16만3000명. 베트남 최대 빈곤 지역이자 대나무 최대 생산지인 탱화성에서 대나무로 수익을 창출할 경우 빈곤 탈출이 가능한 이들의 수다. 2015년 한 논문에서 이 숫자를 발견한 박근우(46) 닥터노아 대표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곤 이렇게 다짐했다. ‘이 16만3000명을 절대 빈곤에서 구해보자. 이게 가능하다면 내 인생 전부를 걸어도 좋다.’
대나무를 원자재로 하는 사업을 구상하던 박 대표의 눈에 들어온 건 칫솔이었다. 예방치의학을 전공한 치과의사인 그는 이듬해 세계 최초로 대나무 전용 식모(植毛)기를 제작해 본격 사업을 시작했다. 대나무 칫솔과 고체 치약 등 친환경 구강 관리 제품을 선보이는 소셜벤처 닥터노아가 탄생한 순간이다. 사업가로서 극빈층 자립과 지속가능한 환경을 위해 애쓰는 그를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빈곤 퇴치는 내 소명
박 대표가 빈곤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건 2008년 한 교회 해외봉사팀에 동참하면서부터다. 당시 충북 청주에서 치과를 운영하던 그는 ‘봉사팀에 치과의사가 필요하다’는 지인의 소개로 합류했다. 생애 첫 해외 구호 활동이었다. “그땐 기독교인도 아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독실한 기독교인이긴 했지만 전 사춘기 때 신앙에 회의가 들어 교회를 떠났거든요.” 그럼에도 교회와 구호단체 해외 봉사엔 꾸준히 참여했다. 인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우간다 등에서 마주친 장면이 그의 마음을 울려서다. 병으로 앓아누운 할머니 곁의 해맑은 어린아이를 보면 눈물이 나왔다. 빈곤으로 제 나이답게 살지 못하는 아이를 볼 땐 기도가 터져 나왔다.
“구호 활동 중 이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왜 이들은 가난할까.’ 그러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란 근원적 질문이 생기더군요. 답을 찾고자 2015년 우간다 구호 현장을 다녀온 뒤 자발적으로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는 교회 새벽기도회 중 자신의 소명을 확인했다. ‘빈곤 퇴치로 극빈자를 살리는 일’이었다.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시기입니다. 이때 빈곤 퇴치가 소명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치과의사로 환자를 돌보는 일도 가치 있지만, 그보다 하루에 1.5달러 미만으로 사는 이들을 돕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노아처럼 미친 사람 찾습니다
세계 극빈 지역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학교와 우물 등을 세워온 그는 그간의 경험을 살려 소셜벤처 방향을 기획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함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뱅크’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봉사와 후원이 아닌 기업 운영으로 수백만의 빈곤 인구를 줄일 수 있다는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현지의 풍부한 자원으로 사업해 현지인 소득 증대를 꾀한다’는 목표로 관련 논문을 찾고 대나무 칫솔로 사업 아이템을 정한 박 대표는 시장조사를 위해 중국을 찾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모든 대나무 칫솔은 중국에서 만듭니다. 현지 제조 공정을 보니 식모 과정에서 불량률이 50%나 되더군요. 이를 보고 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불량률을 줄이는 기계를 개발하면 해결될 거로 봤거든요.”
가진 돈 대부분을 투자해 대나무 전용 자동 식모기를 제작했지만 곧 위기에 봉착했다. 기계가 의도대로 작동되지 않아서다. 이때 그는 이경태 닥터노아 최고기술책임자(CTO)를 영입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공학박사 출신인 이 CTO는 네팔과 라오스 산골에서 전기 생산을 돕는 소셜벤처를 운영한 경험이 있었다.
‘이 기계 고쳐서 16만3000명 빈곤 탈출시키고 우리는 노벨평화상을 받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 CTO는 아예 신기술을 도입한다. 대나무를 틀에 넣고 열과 압력으로 찍어내 대나무 칫솔을 만들어내는 ‘핫프레싱 기법’이다. 이 기술로 제조 자동화에 성공한 그는 기술력을 강조하며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투자를 끌어냈다. 이후 국내 대기업과 정부 유관기관에도 닥터노아의 가치와 제품 성능을 인정받아 현재까지 100억 이상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매년 성장을 거듭한 닥터노아의 올해 예상 매출은 50억 정도다.
“우리가 지금까지 온 건 빈곤 문제 해결에 관심 많은 ‘미친 사람’이 함께 일하기 때문입니다. 소셜벤처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노아처럼 위대한 미친 사람 찾기’였어요. 노아는 100년간 산에 배를 만들면서 ‘미친놈’ 소리를 듣지만 결국 세상을 구하잖아요. 그렇게 찾은 이들이 이 CTO와 하버드대 재학 중 우간다에서 소셜벤처를 운영한 계요한 공동대표 등입니다. 모두 닥터노아의 ‘핵심 선수’죠.”
우공이산(愚公移山)
대나무 칫솔로 16만3000명을 자립시키자는 닥터노아의 미션 수행은 현재진행형이다. 2028년엔 품질·제조 공정 고도화로 플라스틱보다 싸고 질 좋은 대나무 칫솔을 만드는 게 목표다.
“아직 엄청나게 큰 성취를 냈다고 보긴 어렵고 한결같이 비틀거리고는 있지만 지금도 목표를 향해 가곤 있어요.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기듯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해보겠습니다.”
기독 청년에겐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는 당부도 남겼다. “여러 청년에게 구호 활동 이야기를 해보니 대부분 너무 위험할 거라고들 생각해요. 가보면 안전하고 재미도 있거든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할 일이 참 많은 곳이고요. 의사 등 특정 직업이 꿈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걸 꿈꾸는 청년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