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고 길고 느린 기성세대와 달리
디지털세대는 정반대의 생활 양식
드라마도 주요 하이라이트로 시청
이들에게 느림은 곧 '지루함' 으로
여백은 아름다움 아닌 '빈칸' 인식
인생에는 다양한 박자와 강약 필요
아날로그 문화도 물려줘야할 유산
디지털세대는 정반대의 생활 양식
드라마도 주요 하이라이트로 시청
이들에게 느림은 곧 '지루함' 으로
여백은 아름다움 아닌 '빈칸' 인식
인생에는 다양한 박자와 강약 필요
아날로그 문화도 물려줘야할 유산
“MZ는 가볍고 짧고 빠르게 생활한다.” MZ세대 관찰기의 세 번째 테제다. 기성 인류가 오프라인 세상에서 무게 있고 길고 느리게 삶을 영위했다면 MZ세대는 온라인 세상에서 정반대의 생활 양식과 가치 체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이들의 문화는 가볍고 짧고 빠르다.
MZ는 드라마도 요약본으로 모아 봐
언제부턴가 강의 중에 화제 드라마 이야기가 나와 시청 여부를 물어보면, 상당수 학생이 짤방 동영상으로 인지하고 한두 시간짜리 요약본으로 봤다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요약본은 당연히 영화의 쿠키영상 같은 부가 콘텐츠라 여겼던 나와 달리, 그들은 요약본 시청 행위도 드라마를 본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요 하이라이트만 모아 보는 건 전체 분량을 순서대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시청 경험이라고, 그건 드라마 예고편만 본 거나 마찬가지라고 각종 훈수를 뒀지만 쇠귀에 경 읽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처음엔 드라마 볼 시간이 없어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학생들은 시간이 남아돌아도 드라마 완주란 큰맘 먹고 수행해야 하는 일종의 고난도 과제로 인식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궁합이 맞지 않는구나. 뭔가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는 것처럼. 기성세대의 단편소설이 MZ세대에겐 장편소설이 될 수도 있겠구나.
숏폼 문화와 스낵 컬처
흔히 MZ세대 문화를 숏폼(short-form) 문화로 이야기한다. 숏폼 문화에선 드라마 전편보다는 요약본의 분량과 속도가 훨씬 더 맞는 콘텐츠일 수 있다. 인터넷 세상의 유행 코드인 밈(meme) 문화 확산과 더불어 쇼츠(Shorts), 릴스(Reels), 틱톡(TikTok) 같은 짧은 동영상 제작·공유 플랫폼이 디지털 인류의 핵심 문화 거점 중 하나로 부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디지털 세대들이 단지 시간 효율성과 편리함을 좇기 때문에 숏폼 콘텐츠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가벼움, 짧음, 빠름이 그들의 생활 리듬과 더 잘 맞아서라고 봐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바로 쉽게 즐길 수 있는 특성 때문에 숏폼 콘텐츠를 스낵 컬처(snack culture)로 부르기도 하는데, 적확한 표현은 아니다. 짧은 문화 콘텐츠는 MZ의 간식거리나 주전부리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스낵이라기보다는 주 식단이나 정찬으로 봐야 한다(결이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편의점도 그들에겐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이 될 수도 있다).
MZ문화는 다른 속도의 철학·미학 필요
온라인 사회의 속도에 익숙한 디지털 태생들이 유독 느림을 못 견디는 모습을 종종 목도하는데, 생각해보면 당연지사다. 마블(Marvel) 영화 세계관에 등장하는 타노스가 인피니티 스톤 건틀릿을 장착하고 손가락 튕김 하나로 순식간에 우주 생명체 절반을 없애 버릴 수 있는 권능을 얻게 된 것처럼, 디지털 인류도 휴대전화 하나만 있으면 엄지손가락 밀기로 온라인 공간의 이 세계 저 세계를 언제든 넘나들면서 인간 삶의 거의 모든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세상이 됐다. 광속의 반응 속도를 보여주는 온라인 공간과 그 효능감에 익숙한 이들에게 느림은 곧 지루함이고, 여백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빈칸에 더 가깝다.
온라인 세상의 삶은 인류에게는 처음 접하는 시공간 경험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고정된 공간을 점유하며 살던 아날로그 인류와 달리 디지털 인류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무한히 확장 가능한 공간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면서, 동시에 탐험하면서 살고 있다. 이 시공간에 살다 보면 빠른 속도는 필수다. MZ 문화는 느림의 철학이나 미학 대신에 빠름의 철학이나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세상의 멀티버스
기성세대가 아다지오(Adagio·느리게) 속도로 살아왔다면 MZ는 알레그로(Allegro·빠르게) 속도로 살고 있다. 시공간 경험은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다. 온라인 세상을 주 터전으로 삼고 있는 MZ는 처음부터 아날로그 인류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세상을 살아왔다. 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MZ가 빠른 속도로 사는 세상은 아날로그 세대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으로 봐야 한다.
문제는 현재 이 서로 다른 유니버스의 문화가 공존하고 충돌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세계의 충돌이 가져올 파국의 위험을 논할 필요는 없겠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고 우주에는 또 새로운 균형 상태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중요한 관심사는 이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우주에, 새로운 디지털 세상에 어떤 문화를 넘겨줄 것인가.
아날로그 문화를 가르치는 이유
솔직히 말해 지난 20여년간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학자로서 자못 난감한 시기였다. 아날로그 시대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를 공부했는데, 세상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체제로 급속히 변해갔다. 변동 속도를 따라잡기 위한 새로운 공부도 필요했고 동시에 교육도 해야 했다. 현 대학 교육을 빗대어 ‘20세기 교수들이 19세기 방식으로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치는 형국’이라고 자조 섞인 이야기를 하는데 미디어 분야야말로 딱 그랬다.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 세상을 가르쳐야 했는데 아직 그 세상은 완성도 되지 않았고, 그것을 다루는 이론과 철학은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에 기반한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학생들에게 디지털 미디어보다는 아날로그 미디어를, 디지털 문화보다는 아날로그 문화를 더 많이 가르치고 있다. 사실 디지털 미디어와 디지털 문화는 그들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오히려 필요한 것은 아날로그 미디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아닌가. 아날로그 미디어와 문화에서 무엇을 저장하고 무엇을 삭제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대의 몫이다. 하지만 가볍고 짧고 빠르게 디지털 세상을 사는 것에 익숙한 MZ에게 때론 심호흡과 느릿한 걸음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다양한 박자와 리듬과 강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생에는 안단테도, 스타카토도, 레가토도 필요하다. 아날로그 문화의 풍부함은 디지털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유산이 돼야 한다.
홍종윤 서울대 BK교수·언론정보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