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스승의 애호박

입력 2023-05-19 04:05

서울 홍제역 앞, 할머니가 떨이로 애호박을 내놓았다. 그 모습을 보니 저절로 ‘스승의 애호박’이 떠올랐다. 작년 5월 나는 친구들과 전북 전주에 계신 스승을 뵈러 갔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은 전보다 흰머리가 늘어나 있었다. 콩나물국밥을 먹고 산책할 겸 남부시장 건너편 둑길을 걸었다. 그곳에 새벽 장이 선다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이미 파장이었다.

스승은 떨이 바구니 앞에서 쉬이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흔하디흔한 게 호박 아닌가. 일행이 차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나는 호박을 사서 서울까지 들고 갈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제자들의 이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스승은 애호박을 세 봉지나 샀다. 무거운 봉지를 선뜻 받아 들지 못하고 친구들과 떠넘기다가 결국 내가 호박을 받아 들게 됐다.

집에 오자마자 식탁 위에 쌓은 애호박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세어보니 서른네 개였다. 저 많은 애호박을 다 어쩐다? 궁리하다가 건새우를 넣고 전을 부치고, 애호박 젓국을 끓이고도 열네 개가 남았다. 여차하면 이른 더위에 호박이 무를지도 모른다. 한 개도 허투루 버리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다음 날 특강이 있으니 수강생들에게도 나눠줘야겠다 마음먹었다.

다음 날 수업 시간, 깜짝 선물이 있는데 뭔지 맞혀보라고 내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도 정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가방에서 애호박을 꺼내 보이자 수강생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의외의 장소에서 애호박을 보니 신선한 모양이었다. 애호박은 ‘묘사’를 설명하는데 좋은 소품이 됐다.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리듯이 써보세요. 연두색 모자를 눌러썼고, 잔가시 같은 솜털이 돋았고….” 수업에 활기가 돌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때 애호박을 흔쾌히 받아들 것을. 봉지를 건네주고 좋아하시던 스승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날 스승은 애호박만 사준 게 아니라 소중히 간직하고픈 사연까지 덤으로 주셨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