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막 이순(耳順)을 바라볼 때쯤이었을 겁니다. 지천명(知天命)을 지내고도 하늘은커녕 한 치 코앞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괜한 압박감에 맘이 빠듯했습니다. 그동안 뭔가 꼭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속이 헛헛했습니다.
그럴 때는 무거운 책을 잠시 덮어두고 가벼운 소설이나 슬픈 시를 읽는 것이 약이 되지요. 부랴부랴 책방으로 달려가 서가를 둘러보는데 작은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240여쪽 되는 작은 책이지요. 글자도 큼직하고 드문드문하니 가뜩이나 침침해진 눈에 좋겠고, 짧게 끊어지는 편지글이니 뭐 따지고 판단하고 분석할 일도 없이 그냥 읽으면 됩니다. 흔들리는 맘을 달래기에는 딱 제격이었지요. 그러나 이 책의 여운은 결코 짧지도 가볍지도 않았습니다.
이 책은 서른세 살에 사고를 당해 전신 마비가 된 심리상담 전문의 대니얼 고틀립이 자폐아인 그의 손자 샘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입니다. 온몸이 마비된 채 휠체어에 앉아 일생을 보내야 하는 할아버지가 자기 안에 갇혀 사는 손자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거기에 무슨 삶이 있고 희망이 있고 이야기가 있겠습니까. 너무도 차갑고 어둡고 절망적이지요. 그러나 대니얼의 편지는 더없이 따뜻하고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거기에 따뜻하고 뭉클한 삶이 있고 밝고 맑은 희망이 있습니다.
대니얼은 어느 밤 꿈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낯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세상의 일부를 맡길 테니 잘 돌보도록 하여라. 그것이 너에게 부여된 임무다. 더 크게도 더 좋게도 만들지 말고 그저 잘 보살피기만 하여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소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를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에 주신 소명이라면 얼마나 귀하고 거룩할까요.
그런데 그가 꿈에서 깨어 자기에게 맡겨진 그 세상의 일부를 보니 그게 겨우 3㎜였습니다. 3㎜는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최대 거리지요. 세상에 이게 무슨 소명이고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걸 가지고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니얼은 그 3㎜의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잘 돌보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의 편지들은 그가 필생의 소명으로 받은 그 3㎜ 세상을 돌보는 보고서입니다.
어쩌면 편지란 결국 삶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말입니다. 그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삶을 보고 마음을 추스르고 희망을 줍게 됩니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는 흔들리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편지를 쓰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