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결혼이민자를 지원하는 정책이 나온 지 20여년이 지났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들을 단순히 인구 유입 측면이나 결혼과 출산을 수행하는 역할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다. 하지만 장기체류 이주여성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정책도 변화하는 중이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전체 결혼이민자 중 15년 이상 한국에 장기 정착한 결혼이민자가 2018년 27.6%에서 2021년 39.9%로 급증했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 정착해 사회 구성원으로 사는 결혼이민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한국어 구사 능력, 교육 부족 등의 문제로 현실적 장벽 역시 높은 실정이다. 최근에는 양질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한국어뿐 아니라 컴퓨터 활용 기술, 검정고시 합격 등 진로 교육을 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배움 뒤 꿈이 생겼어요”
응엔 디 풍(37)씨는 올해로 베트남에서 한국에 온 지 13년이 됐다. 한국인 남편을 만나 전남 곡성의 한 시골 마을로 시집 왔다. 곧바로 딸을 낳았고, ‘유하나’라는 한국 이름도 얻었다. 베트남에서는 선생님을 꿈꿨지만, 한국에서는 꿈도 없이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를 돌보는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았다.
딸에게 간식이라도 사주려 돈을 벌고 싶었지만, 유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동네 마트나 카페의 단순 아르바이트뿐이었다. 한국어에 능숙하지 못한 데다 숫자에도 익숙지 않아 늘 주눅이 들었다고 했다.
유씨가 공부를 결심한 건 지난해부터였다.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은 집에서 숙제할 때도 모르는 게 있으면 늘 아빠를 찾았다. 유씨는 “아이가 ‘엄마는 모르잖아’라면서 아빠한테만 숙제를 물어볼 때는 서운하고 섭섭하기도 했다”면서 “점점 다른 사람하고 대화도 거의 하지 않고 외롭게만 지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던 유씨는 지난해 곡성군 가족센터의 ‘검정고시 준비반’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초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여성가족부와 한국건강가정진흥원이 포스코1%나눔재단의 지원금으로 3년간 결혼이주여성 자립역량강화를 돕는 사업이었다.
공부가 쉽진 않았다. 집안일을 마친 뒤 자는 시간을 쪼개 숙제를 해야 했다. 유씨는 “일주일에 3번 수업을 가고, 집에 오면 공부를 하고 숙제도 해야 했다”라며 “그래도 합격한 뒤로는 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내게 수학을 물어보기도 하고, ‘엄마가 멋있다’고도 해준다. 딸과 공부를 같이 하니까 대화도 많이 하게 됐다”고 뿌듯해했다. 유씨는 중학교 검정고시 시험도 준비 중이다. 그는 “예전에는 아르바이트만 했었는데, 지금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니며 다문화 이해 강사로도 일하고 있다”며 “이제 다른 엄마들처럼 나도 당당한 엄마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컴퓨터 배워 스마트스토어 개설도
경북 영양군에 있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는 결혼이주여성이 모여 일주일에 2회 컴퓨터 교육을 받고 있다. 이 지역은 인구가 감소하면서 10년 전에 컴퓨터 학원이 사라졌다.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려면 1시간 거리 시내로 나가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 한국말이 서툴고 지리에 어두운 결혼이주여성들은 왕복 2시간씩 걸리는 동네 밖으로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결혼이주여성 대부분은 컴퓨터 문서 작성이나 인터넷 검색 방법 등을 모르다 보니 단순 노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영양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결혼이주여성을 위해 지난해 컴퓨터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센터는 SNS, 현수막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알렸고, 10명이 수업을 신청했다. 이들은 센터에서 지원하는 노트북으로 4개월 동안 기초 한글 타자를 배운 후 한글, 파워포인트, 엑셀 교육을 받았다.
수강생 중 한 명인 원하영(31)씨는 6년 전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이주해 남편과 결혼했다. 원씨는 온종일 사과 농사일을 돕느라, 컴퓨터는 접한 적이 없었다. 원씨는 센터 강사를 통해 한글 타자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센터 관계자는 “원씨가 한글 타자에 익숙하지 않아 처음엔 손가락 두 개를 이용해 단어들을 겨우 써 내려갔다”며 “하지만 몇 달 동안 수업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결과 실력이 빠르게 늘었다”고 전했다.
파워포인트, 엑셀 등을 능숙하게 다루게 된 원씨는 컴퓨터 관련 자격증 5개를 취득했다. 원씨는 “처음에는 한글을 어떻게 치는 줄도, 사진을 어떻게 편집해야 할지도 몰랐다”며 “이제는 한국에서 사회인으로서 한 발자국 나아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결혼이주여성인 왕펑쉬에(40)씨도 뒤늦게 컴퓨터 기술을 익힌 경우다. 왕씨는 5년 전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해 간단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3개월 동안 밤낮으로 교육을 받은 결과 파워포인트, 포토샵, 한글 등 자격증 3개를 취득했다.
왕씨는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매일 다문화센터로 달려가 공부했다”며 “처음에는 겁을 먹었지만, 선생님들이 끈기 있게 설명해준 덕에 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수강생 중 6명은 스마트스토어 등으로 온라인 창업에도 성공했다. 원씨는 엑셀, 포토샵 등을 활용해 스마트스토어에서 사과를 판매하고 있다. 왕씨는 벽걸이 장식 등 중국산 장식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을 창업했다. 김금옥 한국건강가정진흥원 이사장은 “결혼이주여성의 기초학습·정보기술 역량을 향상해 사회적 진출을 지속해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