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1980년대 초, 경기도 용인의 한 편물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했다. 편물 기계는 내 키만 했고, 편물 옷 한 묶음은 내 덩치만 했다. 하루 치의 힘겨운 노동이 끝나면 공장 근처에 자리한 예배당으로 퇴근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매일 밤 교회에서 울다 잠들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대신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이 그런 나를 돌아봤다. 사택에 빈방이 있으니 들어와 살라고 했다. 늦은 밤 집에 오면 부엌에 쌀과 반찬이 놓여 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사모님의 요청으로 사택에 가니 푸짐한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오늘이 해영씨 생일이라고 해서 미역국을 끓였어요. 맛있게 먹고 일하러 가요.”
나는 출생 직후 맏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던져져 척추 변형이 일어나 장애인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엄마는 정신질환을 앓았고, 나를 장애인으로 만든 아버지는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엄마의 폭행과 저주를 피해 집을 나와 직업학교에서 기술을 배운 뒤 취직해 낯선 곳에서 혼자 살아보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때 겨우 16살이었다. 목사님 부부는 내 생일을 챙기며 나를 “해영씨”라고 불렀다. 목사님의 축복 기도를 받고 생애 처음으로 생일상을 받았다.
“사모님, 공장이 문을 닫았어요. 다행히 다른 곳에 취직이 되어 이곳을 떠나야 해요.”
“그래요? 내가 해영씨를 위해 선물을 줄게요. 이 성경책 속에 있는 말씀이에요. 이곳을 떠나도 하나님께서 함께할 거예요.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도록 해요.”
사모님은 여호수아 1장 5~9절을 내 앞에서 소리 내 읽어준 뒤 축복 기도를 해 줬다. 나는 그곳을 떠난 후 지금까지 세상을 돌아다니며 살고 있다. 이 말씀을 읽는 동안 내 거처는 일본과 보츠와나, 미국과 케냐로 이어졌다. 또 기술자에서 선교사로 소명 받은 자의 삶을 살게 됐다. 여호수아 1장 말씀을 마르고 닳도록 읽는다. 여호수아서 앞뒤에 있는 성경 말씀도 읽고 이를 마음에 새기며 산다. 이제 나는 이 말씀의 증거자로 살고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수많은 장애아동과 가출청소년, 방황하는 청년과 꿈을 잃은 세대…. 이들은 또 다른 ‘해영씨’다. 한국에도 있고 아프리카에도 있다. 나는 또 다른 해영씨를 기억하고 함께 맛있는 밥을 먹으며 내가 받은 생애 최고의 선물인 여호수아 1장 말씀을 전하고 있다.
<약력> △밀알복지재단 희망사업본부(케냐) 본부장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소속 케냐 선교사 △재단법인 빈손채움 이사 △사단법인 그루맘 이사 △굿네이버스 케냐 이사 △글로벌블레싱 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