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이달 초 여당 지도부에 비공개로 보고한 ‘윤석열 정부 온라인 플랫폼 규율 법안’ 내용이 알려지자 대통령실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다(국민일보 5월 11일자 1·3면 참조). 대통령실은 플랫폼 자율규제라는 현 정부 기조를 망각한 채 공정위가 대통령실에 제대로 된 보고 없이 당정협의를 진행한 데 대해 사후 경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정위는 대형 플랫폼 독과점 폐해가 심각한 상황에서 여당의 법안 내용 요구 등으로 신속한 대응이 필요했다는 입장이지만, 부처 간 협의 등 정상 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다는 게 대통령실 시각이다.
공정위가 사안을 논의 중인 ‘온라인 플랫폼 규율개선 전문가 태스크포스(TF)’ 참여자들에게 입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강요한다는 불만도 터져 나오고 있다.
‘청부입법’ 시도했다 궁지 몰린 공정위
14일 공정위와 국회에 따르면 공정위는 이달 초 비공개 당정협의를 열고 플랫폼 정책 추진 방향을 보고했다. 한기정 공정위원장이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원회 의장에게, 윤수현 부위원장이 국회 정무위원회 여당 간사인 윤한홍 의원에게 각각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의 보고 문건에는 ‘윤 정부 온라인 플랫폼 법안’의 주요 내용까지 상세히 들어있다. 네이버와 카카오, 애플, 구글 등 국내외 5~6개 대규모 플랫폼 업체만을 규율 대상으로 지정해 독과점 행위를 강도 높게 규제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이 같은 공정위 행보의 배경에는 대형 플랫폼의 독과점을 막을 법을 만들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여당은 지난해 10월 카카오톡 대규모 먹통 사태를 계기로 플랫폼 독과점에 대한 강도높은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문제는 공정위가 정상적인 절차를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공정위는 문재인정부 때처럼 관련 TF 논의와 부처간 협의를 거쳐 공식적인 ‘정부안’을 만들어 입법하는 방식이 아닌 청부입법을 시도하려 했다. 현재는 대통령실이나 관련 부처와 협의도 없었고, 관련 TF에서는 어떠한 결론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공정위는 여당 보고 문건에서 “여당이 발의 가능한 ‘윤석열 정부 플랫폼 법안’을 신속히 마련해 제시(5월 중)”라면서 “현 자율규제 기조를 감안해 여당에서 법안을 발의하고 공정위는 관련 논의에 참여”라고 밝혔다. 이를 뒤늦게 파악한 대통령실은 주요 국정과제인 플랫폼 자율규제 정책을 공정위가 독단적으로 추진한 데 대해 문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의 관련 TF 외압 논란
이런 상황에서 공정위가 빠른 입법화를 위해 관련 전문가 TF에 외압을 넣었다는 의혹까지 일고 있다. 공정위는 지난 1월부터 ‘온라인 플랫폼 규율개선 전문가 TF’를 구성해 플랫폼 독과점 관련 규제를 검토하는 중이다. 하지만 17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해당 TF는 아직 구체적인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다. 상반된 견해를 가진 전문가들이 매 안건마다 충돌하며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한 TF 관계자는 “6페이지짜리 안건이 있어도 의견이 갈리다 보니 회의 세 시간 동안 한두 페이지 진도를 나가는 것이 고작”이라고 말했다.
논의에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자 공정위는 조바심을 내고 있다는 게 일부 TF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최근 한 회의에서는 공정위 관계자가 TF 위원들에게 “입법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만 만들어달라”는 취지의 발언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독립적으로 운영해 결론을 내려야 할 TF가 공정위가 원하는 내용의 온플법 입법을 위한 요식행위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셈이다. 제3의 TF 관계자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사안인 만큼 제대로 된 숙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법안도 힘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TF는 오는 7월까지 운영될 예정이었는데 공정위는 5월 중 결론을 내려달라고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는 왜 서두를까
공정위가 법제화를 서두르는 것은 먼저 입법에 성공하는 부처가 플랫폼 이슈 주무부처로 등극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방통위와의 주도권 다툼으로 법안 처리가 무산됐던 지난 정부에서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심산으로도 풀이된다. 한 경쟁법 전문가는 “독과점 온플법안이 잡음 없이 국회를 통과해서 공정위가 주무부처로 자리 잡는 것이 공정위의 최대 관심사일 것”이라며 “TF의 논의 방향이 당초 공정거래법 개정에서 특별법 발의 쪽으로 바뀐 것도 주도권 확보를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플랫폼 규제가 국정 이슈로 떠오른 지난 2020년 하반기부터 국회에는 온플법 관련 법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국회에 계류된 법안만 17건에 달한다. 공정위는 이번 정부의 온플법 논의는 독과점 문제에 집중돼 있고, 독과점 문제는 오롯이 공정위의 소관 사안이라고 설명한다. 공정위 관계자는 “독과점은 어느 나라든 경쟁 당국이 담당하는 사안”이라며 “다른 부처와 영역 다툼이 발생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밥그릇 싸움’의 불씨는 아직도 남아 있다. 방통위는 지난 2월 발표한 올해 주요업무 추진계획에서 “플랫폼 불공정행위에 대응해 이용자 피해사례를 분석하고 사업자 규제체계를 정비하겠다”며 연내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을 예고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이런 정책을 추진하면서 대통령실을 패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TF 참여자들에게 논의 속도를 높여 달라고 요구한 것은 맞지만 더 자주 논의를 하기로 결정했을 뿐 결론을 강요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세종=이의재 기자 sentin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