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소아과 오픈런’… 출산율 최저 국가의 민낯

입력 2023-05-15 04:08
어린이 전문병원 ‘소화병원’ 진료를 원하는 부모들이 13일 새벽 4시50분쯤 서울 용산구의 병원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다. 이 병원은 오전 6시부터 접수 번호표를 나눠주는데, 빠른 번호를 받기 위해 새벽부터 나온 것이다.

서울역 뒤편에 있는 소화병원. 1946년 문을 연 국내 첫 어린이 전문병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2차 병원이면서 주말 진료도 가능해 많은 부모가 찾는다. 특히 최근 영유아들 사이에서 감기가 크게 유행하면서 동네 소아청소년과를 전전하다가 이곳을 찾는 발걸음이 많아졌다.

13일 오전 4시8분, 소화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9개월 된 아이가 1주일 넘게 고열에 시달리며 폐렴 초기 증상을 보여서다. 아직 세상은 캄캄했지만, 닫힌 건물 정문 앞에는 이미 6명의 보호자가 줄줄이 앉아 휴대전화를 보거나 졸고 있었다. 아침 6시부터 접수를 위한 번호표를 나눠주는데, 빠른 번호를 받기 위해 새벽부터 나온 것이다.

‘작정하고’ 나온 이들은 5월 중순임에도 겨울용 외투를 입고 캠핑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켜고 업무를 보거나, 태블릿 PC로 영화를 보는 이들도 있었다. 캠핑용 야전 침대가 등장하는 날도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순서는 서울 동작구에서 온 30대 남성 A씨였다. 그는 캠핑 의자에 앉아 후드티를 뒤집어쓴 채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병원에 도착한 건 새벽 2시였다. 3살 아이가 20일째 고열과 미열을 오가며 폐렴 초기 증상을 보인다고 했다. 그의 수고로 아이는 이날 가장 먼저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느냐’는 질문에 A씨는 “부모 마음이 다 똑같지 않나요”라며 멋쩍게 웃었다. 계속 열이 나는 아이를 병원에서 오랜 시간 대기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고 했다. A씨는 “병원이 아이한테 좋은 환경은 아니잖아요”라면서 “아이가 열이 나서 힘드니깐 빨리 진료받고 빨리 쉬게 하고 싶은 마음이에요”라고 말했다. 이 병원은 오전 중에 당일 접수가 종료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일찍 나온다고 걱정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A씨는 “요즘 아이들 ‘입원 대기’도 심하다고 해서 입원 결정이 나오면 어느 병원에 입원해야 할지도 걱정하고 있다”고 했다.

A씨 다음으로 병원에 도착한 건 서울 마포구에서 온 여성 B씨. 오전 2시30분쯤 도착했다. B씨는 “맨날 남편이 새벽에 줄을 서는 게 미안해서 오늘은 직접 와 봤다”고 말했다. B씨의 둘째 아이는 평소 비염도 있고 코감기에 자주 걸린다고 했다. 동네 소아과를 가봤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아 이 병원을 찾았다.

대기 줄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B씨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요”라고 묻더니 이내 다시 혼자 답했다. “하긴 모바일로 예약을 해도 ‘클릭 전쟁’이 될 게 뻔한데, 어떻게 보면 이게 가장 공정한 방식인 것 같기도 하네요. 가장 절실한 사람들이 먼저 나올 테니까요.”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는 않아 보였다. B씨는 “정부는 새벽부터 줄 서는 부모들의 절실함을 모르는 것 같아요”라며 “맨날 저출산 대책을 세운다고 하는데 당장 ‘소아과 대란’ 현상을 좀 봐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세 번째로 도착한 C씨는 몇 년째 이 병원을 이용하고 있는 단골이었다. C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새벽 4시에 오면 1등을 할 수 있었는데, 올해 초부터는 4시에 오면 이미 사람들이 4~5명 와 있다”며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새벽에 나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C씨는 “한번 늦게 왔다가 하루종일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렸더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괜찮은 소아과가 많아져야 할 텐데 갈수록 소아과가 줄어든다고 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간이 의자를 들고 온 C씨는 조만간 캠핑 의자를 구매해야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더 많은 날을 병원 앞에서 지새우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 듯했다.

오전 5시10분이 되자 건물 외관에 불이 들어왔다. 경비원이 나타나 “들어오세요”라고 안내했다. 17명의 대기자는 일제히 일어나서 캠핑 의자와 짐을 주섬주섬 챙겨 건물 내부 1층에 들어갔다. 지금부터 오전 6시까지는 건물 1층 내부에서 기다리는 시간이다. 뒤이어 도착한 대기자들은 자신보다 먼저 온 사람들을 보고는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여기가 끝인가요”라고 물으며 차례대로 줄을 섰다.

오전 5시58분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번호표 배포 2분 전이다. 경비원이 오전 6시를 알리자 줄줄이 2층에 올라가 불 꺼진 병원에서 순서대로 번호표를 뽑았다. 딱 1분 만에 29번까지의 번호표가 뽑혔다.

정식 접수는 오전 8시20분부터다. 새벽에 무표정한 얼굴로 홀로 자리를 지켰던 대기자들은 이번에는 아픈 아이를 품에 안고 다시 모여들었다. 물론 퀭한 눈이었지만 얼굴에는 약간의 온기가 더해져 있었다. 드디어 새벽부터 기다려온 진료가 시작됐다.

글·사진=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