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주재=장남’ 15년만에 깨졌다… 대법 “나이순”

입력 2023-05-12 00:02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1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장남 제사 주재자 지위 인정 여부 등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연합뉴스

장남을 비롯해 남성이 제사 주재자에 우선 지정된다는 대법원 판례가 15년 만에 뒤집혔다. 유족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남녀, 적서(적자와 서자)를 불문하고 고인의 직계비속 중 가장 연장자가 제사 주재자를 맡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11일 A씨가 “남편의 유해를 돌려 달라”며 남편의 내연녀 B씨와 B씨 아들을 상대로 낸 소송 상고심에서 ‘제사 주재자인 아들 측에 유해 소유권이 있다’는 취지의 원심 판단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종전 전원합의체 판결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며 “현대사회 제사에서 부계혈족인 남성 중심의 가계계승 의미는 상당 부분 퇴색했다. 제사용 재산 승계에서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가 없고, 헌법 정신에도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A씨는 1993년 남편과 결혼해 두 딸을 뒀다. 남편은 2006년 결혼 생활 중 B씨와 외도를 저질렀고 아들을 얻었다. 남편은 2017년 숨졌는데, B씨는 아무런 협의 없이 고인 유해를 화장해 경기도 한 추모공원 납골당에 안치했다. A씨와 딸들은 B씨와 아들, 추모공원 운영 법인을 상대로 유해를 돌려 달라는 소송을 냈다. B씨가 낳은 아들은 혼외자이고 미성년자라 제사 관련 일들을 처리하기 부적절하기 때문에 장녀 또는 자신들이 제사 주재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2심은 모두 200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근거로 B씨 손을 들어줬다. 당시 판결은 망인의 공동상속인 사이에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적서를 불문하고 장남이 제사 주재자가 된다고 판시했다. 장남이 사망해도 그의 아들인 장손자가 주재자가 되게 했으며, 아들이 없는 경우에 한정해 장녀가 제사 주재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1심은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 같은 차별은 조상숭배와 제사 봉행이라는 전통의 보존과 제사용 재산 승계에 대한 법률관계를 간명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A씨 측은 불복해 항소했는데, 2심 역시 1심 판단이 옳다고 보고 기각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제사 주재자로 장남 등 남성을 우선하는 것을 보존해야 할 전통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제사는 조상숭배라는 전통에 근거하지만, 헌법상 양성평등 이념과 조화돼야 한다”며 원심 판단을 뒤집었다. 다만 이번에 변경한 판례는 이후 제사용 재산의 승계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만 적용하기로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남성 중심 가계계승을 중시했던 적장자 우선의 관념에서 벗어나 제사 주재자를 정하는 방법을 헌법 이념과 현대사회의 보편적 법의식에 합치되도록 했다는 점에서 판결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