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내리는 커피] 빼앗긴 ‘다방골잠’

입력 2023-05-13 04:03

1898년 8월 12일자 매일신문을 보면 다방골 사는 옥진이라는 기생이 죽어 발인이 이뤄진 날 서울 시내 여기저기 길거리에서 여러 명의 남자들이 길을 막고 치제(제사 올리는 예)를 올렸다고 한다. 옹진군수 아들과 백년가약을 맺었지만 그가 다른 여성과 결혼하자 이 여성이 비관해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다방골, 청계천과 남대문로가 만나는 사거리 남서쪽, 그러니까 광통교 남쪽은 이렇듯 예부터 서울에서 스캔들이 많던 곳이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행하는 다도와 차례를 주관하던 관청 사옹원이 운영하던 다방이 이곳에 있었기에 다방골이라 불렸다. 관에서 시도 때도 없이 주관하는 다도와 차례에 동원되던 기생들이 많이 기거했다.

일본에 의해 조선이 망하자 관청에서 운영하던 기생제도가 사라졌다. 특히 총독부는 기부(妓夫·후원하는 사내)가 있는 여성은 기생을 할 수 없도록 했다. 당시 서울 기생들은 다수가 기부를 두고 있던 반면 지방 기생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생계가 어려운 지방 기생들의 상경이 이어졌다. 특히 기생 문화가 융성했던 지금의 평안도인 서도 출신 기생 다수가 서울 다동으로 모여들었다.

다동에 모인 기생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1913년에 만든 것이 다동기생조합이었다. 초기엔 서울 기생들과 달리 후원자가 없는 ‘무기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무기부조합이라고 칭했다가 1915년부터 다동조합으로 개칭했다. 이들은 주로 다동 주변에서 다양한 공연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의 정착을 돕는 역할을 했다. 이런 면에서 다동에서 활동하던 기생들이 우리나라의 근대적 공연예술문화의 씨앗을 뿌렸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다동에는 이들에 의해 많은 다방과 카페가 생겨났다. 이들 업소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여성들은 아침에 늦잠을 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생긴 말이 ‘다방골잠’이었다. 전날 밤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아침에 늦게까지 자는 달콤한 잠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일본 식민지 권력은 이런 다방골잠마저 빼앗아 갔다. 이들이 지정한 매월 1일 애국일에는 늦잠이 허용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열리는 애국반상회에 참석하려면 일곱 시 전에 일어나야 했다. 식민지 권력은 이를 “총후국민답게” 사는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이들은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조선인들”이 “엄숙하고 점잖게 변해 버렸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응당 아침 커피를 마시러 찾아가던 찻집의 문도 안 열렸다. 조선인들이 자숙의 뜻으로 문을 닫았다는 아전인수식 해석도 덧붙였다. 우리의 역사, 언어, 문화로부터 일상 생활용품까지 전쟁 목적으로 모두 빼앗아 간 식민지 권력은 시민의 아침잠까지 ‘자숙’의 이름으로 빼앗아 갔다. 자숙을 해야 할 것은 그들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자숙은커녕 우리에게 반성을 요구하던 뒤틀린 시절이었다.

우리 땅에서 우리의 아침잠마저 빼앗아 간 전쟁범죄자들을 추모하던 일본 총리가 이 땅을 찾았다. 여전히 자숙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동맹을 앞세워 무엇을 더 빼앗아 가려 하는지 주시해야 할 일이다.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학과 교수 leegs@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