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초 성서유니온 윤종하 총무님이 편지를 보냈다. 박성실 양과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박양은 윤 총무와 내가 다녔던 서울중앙교회 교인으로 연세대학교 재학생이었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는 경기여고 1학년이었는데 잘 생기고 조용하며 온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학생이 모두 은근히 좋아했으나 본인은 초연했다. 나도 관심이 없지 않았으나 중·고등부 지도교사였을 때 가르친 학생이었으니 내색을 할 수 없었고 이성으로 생각한다는 사실 자체가 쑥스러웠다. 그리고는 만나보지도, 소식을 듣지도 않은 채 8년이 흐른 것이다.
그때 나는 마음에 둔 다른 여성이 없었고 박 양이 어렸을 때 보여준 성격이나 그 어머니 장옥춘 권사님의 인품과 신앙을 고려해서 “부모님이 동의하시면” 결혼하겠다고 편지했다. 얼마 후 부모님의 동의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결혼 절차에 들어갔다. 그때 나나 양가의 경제적 상황으로는 내가 한국에 나가서 결혼식을 치른 후 둘이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 올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신부를 네덜란드로 오게 해서 식을 올리기로 했다. 마치 신부를 주문해서 결혼하는 것 같다 해서 그런 것을 ‘소포 결혼’이라고 했다.
100% 중매 결혼이라 할 수는 없지만 8년이나 만나보지 못한 사람과 데이트 한 번 하지 않고 결혼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친구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놀랐다. ‘미래 사회’란 유명한 책을 쓰신 판 리슨(H. van Riessen) 교수는 편지까지 따로 보내 “자네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일 것이다. 자네의 그 용기를 높이 평가한다”고 하시기까지 했다.
어쨌든 ‘소포’는 무사히 도착했고 친구들이 나의 결정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 나라 제도에 따라 시청에서 이뤄진 공식 결혼식에는 주례를 맡은 부시장이 영어로 주례사를 해 줬고, 기숙사 근처 교회에서 드린 혼인예배에는 한국 대사를 비롯해서 교민들 대부분, 반 퍼슨 교수 내외분, 그리고 같이 성경공부를 했던 네덜란드 미국 캐나다 영국 친구들이 모두 참석해서 별로 외롭지 않았다. 비록 양가 부모님이나 친척들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주례는 그때 네덜란드에서 신학을 공부하시던 고 차영배 목사님(총신 신대원 교수)이 맡아 주셨는데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 한 시간, 네덜란드어로 한 시간 길게 하셔서 하객들이 좀 고생했다. 다행히 그 나라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는 의자에 앉을 수 있었으므로 우리는 잘 견딜 수 있었다. 신부가 입은 한복과 축하연에 내놓은 한과도 인기를 끌었다. 이래저래 우리 결혼식은 친구들 사이에 흥미로운 화젯거리가 됐고 새 살림에 필요한 소품들은 그 나라에 특이한 결혼 축하 방식에 따라 장만 됐다.
어쨌든 연애하지 않고 결혼해도 아들, 딸 잘 낳고 50년이 훨씬 넘도록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크게 감사한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