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뛰어난 교수들로 그때 세계 신학계에서 선두 자리를 유지했다. 강의는 알차고 깊이가 있었고 나는 오랜만에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었다. 비록 영어로 강의 듣기가 쉽지 않았지만, 열심히 공부한 결과 1학년이 끝났을 때 전체 2등이란 성적을 받았다. 다음 해에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1등을 한 미국 친구가 장학금을 신청하지 않았다. 스스로 학비를 충당할 수 있으므로 가난한 외국 학생이 하나라도 더 장학금을 받도록 양보한 것이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나는 내가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은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가난한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상이 아니라 얻어먹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몹시 상했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공부를 계속하려면 장학금을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로 고심한 끝에 등록금 면제만 신청하고 생활비는 내가 일해서 충당하기로 했다. 나의 신청서를 본 장학위원들이 서로 눈짓을 하면서 좀 놀라는 것 같았다. 가난한 나라 유학생으로는 좀 별난 경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덕으로 나는 숱한 고생을 다 했다. 음식, 책과 학용품, 피복 등의 모든 비용을 모두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학기 중에서는 캠퍼스 안에서 화장실, 교실, 도서관을 청소했다. 쓰레기 버리기, 페인트칠, 풀 깎기 등 거의 안 해본 것이 없었다. 마침 학교 관리인이 나를 좋게 봐서 무슨 일이든지 생기면 제일 먼저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여러 일을 다 해 보았으므로 “나는 미국에서 송장 치우는 일 외에는 다 해 봤다”고 농담한다.
첫 번째 해 여름방학에는 어떤 큰 식당에서 접시를 닦았는데 정말 힘들었다. 100℃에 가까운 물에 씻긴 접시가 기계에서 계속 밀려 나오는데 그 뜨거운 접시들을 맨손으로 집어내고 선반에 옮겨야 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접시들이 밀려서 깨질 수 있기 때문에 잠시도 쉬지 못했다.
쉴 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마루에서 걸레질을 해야 했다. 식당은 저녁에 영업하므로 접시 닦는 일은 밤에 했다. 자동차가 없어서 빌린 자전거로 출퇴근했는데 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두운 밤에 고속도로로 달려야 했다. 그리고 낮에는 학교 풀밭에서 잔디 깎는 일을 했는데, 펜실베니아의 여름 오후는 유난히도 더웠다.
남의 신세 지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내가 양보한 생활비는 다른 학생의 등록금으로 쓰였을 것이고, 그런 고생으로 나에게는 지구력과 인내력이 생겨서 일생동안 큰 도움이 되었고,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