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된 고학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역시 부잣집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서울대 등록금은 비교적 쌌지만, 동생도 서울대 농대에 다녔기 때문에 시골 빈농으로는 충당하기가 버거웠다. 나는 신입생 때 구입한 교복을 4년간 입었고 겨울에는 미국 사람들이 보내 준 구호품 코트를 입었는데 몸이 왜소해 볼품이 없었다.
대학 강의실에 난방이 될 리가 없었다. 그나마 난로가 있는 다방에는 커피나 차를 살 돈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했다. 추운 겨울날에는 강의실 앞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아서 꽝꽝 언 도시락을 젓가락으로 깨어 먹었다. 당시에는 책도 없었거니와 과외공부 시키느라 읽을 시간도 부족했다. 대학 생활의 낭만이란 넉넉한 부모를 둔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같은 영문과 동기생 가운데 기독교인은 이명섭과 서영호가 있었다. 이명섭(37대 교육부 장관을 지낸 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의 친형)은 중·고등학교에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으나 머리가 뛰어났다. 서영호는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할 정도로 철저한 신앙인이었다. 우리 셋은 그때 대학생이면 거의 다 즐겼던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동기생 여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우리 셋은 서로에게도 존대어를 썼으며 강의실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기도부터 했으니 학과에서는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는 ‘꽁생원’이었다.
그런데 1960년 봄에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우리 셋은 동기생들을 놀라게 했다. 영문과 4학년 남학생 가운데는 우리 셋만 데모에 가담했었기 때문이다. 서로 의논한 것도 아닌데 한참 뛰다가 보니 사람들이 경찰의 최루탄과 곤봉세례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도 놀랐다. 우리 셋은 평소에는 조용하고 권위에 순종적이었다. 그러나 독재와 불의에 대한 비판 정신과 정의에 대한 욕구는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나와 이명섭이 가난했던 것도 무의식중에 작용했는지 모르겠다.
4·19 혁명이 지나가고 강의가 다시 시작되자 우리 꽁생원 3인방은 학과에서 영웅 대접을 받게 되었다. 학년 모임에서 이명섭은 회장, 서영호는 총무, 나는 회계로 선출되어서 자치활동을 주도했다. 졸업 여행도 우리 셋이 주관했는데 회계였던 내가 회비에서 술값을 한 푼도 지출하지 않아서 엄청난 원망과 함께 “소주 딱 한 병만!” 학생들의 애원을 받기도 했다.
졸업 후 이명섭은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회 등에서 교양강의를 많이 했다. 서영호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유학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부산의 한 교회에서 목회하고 그 교단의 총회장으로 섬겼다. 20대 젊은 날에 만나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신앙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소중한 친구들이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