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 충돌이 벌어진 아프리카 수단에서 우리 교민들이 군의 작전을 통해 위험 지역을 안전하게 벗어났다. 이 뉴스를 지켜보던 예비역 해군 중령 이문학(86) 선일교회 원로장로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월남 패망을 앞두고 벌였던 ‘십자성 작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975년 4월 30일 월남(베트남)은 공산주의 세력에 무릎을 꿇었다. 월남 정부는 우방인 한국에 자국 피란민을 안전한 곳으로 이송해 줄 것과 구호 물품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인도적 차원의 지원과 동시에 교민 탈출 작전을 허가했다.
국방부는 해군 특수수송 분대를 4월 6일 부산항에서 출항시켰다. 건국 이래 최초의 해외 교민 구출 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장로는 해군본부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이 작전의 연락장교로 사이공(호찌민)에 있던 주월 한국대사관으로 급파됐다. 작전은 성공했다. 교민을 비롯해 월남 주민 등 1326명을 태운 함정이 5월 13일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베트남판 ‘흥남철수작전’으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한국대사관 공관원을 비롯해 이 장로 일행은 임무 수행을 위해 현지에 남았다. 이들의 탈출은 미국이 책임지기로 약속했지만 어딘가에서 생긴 균열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 24일 경기도 광주 자택에서 만난 이 장로는 “FM방송에서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나오면 즉각 ‘어셈블리 포인트’로 이동해 탈출하기로 미국과 약속돼 있었다”면서 “하지만 노래는 나오지 않았고 29일이 돼서야 인편으로 피신하라는 연락이 와 부랴부랴 약속 장소로 갔는데 헬리콥터는 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망연자실할 새도 없이 모두 미국대사관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그곳도 아비규환이었다.
이 장로는 “줄은 줄어 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 군복을 꺼내 갈아입었다”고 전했다. 군복을 입은 이 장로를 본 미군은 그의 일행을 대사관 본관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도 인파가 가득했다. 이 장로는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부하들과 함께 앞줄을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경비병이 제지하면 현역 군인임을 상기시키고 ‘만날 사람이 있다’고 둘러댔다”고 했다.
이 장로 일행 앞에 드디어 헬리콥터가 내렸고 부하들과 탑승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 장로는 “우리는 탈출했지만 몇몇 외교관이 월맹군에 붙잡혀 그곳 수용소에서 4~5년을 복역하다 귀국했다. 평양에서 온 공작원에게도 시달렸다”며 안타까워했다.
48년 지난 일을 꺼내 놓은 이 장로는 “십자성 작전은 왕복 5000마일(약 8000㎞) 넘는 바닷길을 오가며 성공시킨 역사상 유례 없는 쾌거”라면서 “다만 미 대사관이 주도한 철수 작전은 일부 교민과 공관원에게는 또 다른 시련을 주면서 미완의 작전이 되고 말았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물론 돌아보면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주관하에 일어났던 일이었다”면서 “자유가 이처럼 소중하다는 사실을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옛날 얘기를 꺼낸다”고 말했다.
광주=글·사진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