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는 긴급한 상황… 판결 지연 자체가 유례없는 불의” [이슈&탐사]

입력 2023-04-25 04:06
지난해 9월 파키스탄 신드주 캄바르 샤다스콧 지구가 물에 잠겨 사람들이 무너진 집에서 짐을 챙겨들고 나오고 있다. AP연합뉴스

대형 산불과 유례없는 폭염, 홍수는 더 이상 충격적인 뉴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세계 곳곳에서는 일상이 된 기후위기를 소송으로 극복하려는 시도가 진행 중이다. 과거에는 법정에서 정부나 기업의 기후위기 관련 책임을 주장하면 이색적인 캠페인처럼 취급받았다. 하지만 기후위기에 대한 과학적 사실들이 발견됨에 따라 사법부의 태도도 달라지고 있다. 국민일보는 세계 사법부의 판례 변화를 시작으로 전 지구적 기후위기의 단면들을 보고한다.

“기후위기의 핵심은 인권의 문제다. 젊은이들과 미래세대에게 난폭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원주민들에게 불균형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환경적 불의다.”

미 하와이주 대법원이 지난달 13일 친환경 사업을 표방한 ‘후 호누아’의 계약을 취소시킨 판단에는 현재의 기후위기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긴급한 상황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후 호누아는 벌목한 만큼 나무를 심겠다고 강조했지만, 대법원은 계산이 1%만 달라지더라도 탄소중립을 실현할 수 없게 된다며 사업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이클 윌슨 전 미 하와이주 대법관은 “미래세대에게 거주 가능한 지구를 물려주려면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350ppm 이하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보충의견을 남겼다.


“지구 온도 상승 1.5도나 2도는 과학적 합의가 아닌 정치적 합의”라며 ‘이산화탄소 농도 350ppm’을 기준으로 삼은 그의 보충의견에 세계의 환경운동가들이 더욱 놀랐었다. 현재 측정되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419ppm 수준이다. 윌슨 전 대법관은 지난 22일 국민일보에 “과학적으로 미래세대를 보호할 수준의 기후는 상승 온도가 아닌 대기 중 온실가스의 양이 결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긴급 상황의 기준을 지구 온도의 1.5도 상승으로 둔다면, 그때까지는 기본권 보호가 불필요하다거나 ‘기다려도 된다’는 말이냐”고도 말했다.


그는 정부와 기업의 책임, 어린이와 미래세대의 기본권 확인을 요청하는 각국의 기후변화 소송들이 보다 빨리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일보가 “판단을 미루는 태도에 비판적(critical)인 입장이냐”고 묻자 윌슨 전 대법관은 “‘비판적’이란 말은 그 불의(injustice)의 수준을 과소평가한다”고 답했다. 국민일보가 “판결의 지연은 ‘불의에의 동참’이라는 뜻이냐”고 묻자, 윌슨 전 대법관은 “거기에 ‘유례없는’이란 말을 덧붙이고 싶다”고 했다.

그는 곧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선진국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더 입는 나라에 얼마를 보상할 것인지, 각자가 얼마나 더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면서 “이에 대해 의회와 정부가 결론을 내리긴 어렵겠지만 법원의 태도는 그들과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미 연방법원을 포함한 법원들이 원고의 재판 청구 권리 등의 절차를 오래 따지고 기후위기의 사실 인정이나 책임 판단은 내리지 않는 경향을 두고 “지연 자체가 불의”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미 사법부의 ‘줄리아나 대 미국’ 사건 소송 지휘 태도를 작심하고 비판했다. 윌슨 전 대법관은 “제9연방항소법원은 그들 스스로 ‘일을 할 필요가 없다’며 실로 대담한 결정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간을 끌다가 ‘안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한 것인데, 이는 젊은이들에게 매우 문제 있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라고도 했다.

줄리아나 사건은 2015년 켈시 줄리아나 등 21명의 아동·청소년이 미국 대통령 등이 공해와 기후변화를 방조해 ‘생명 유지를 위한 기후 시스템’에 대한 헌법적 권리가 침해됐다며 제기한 소송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상징적인 기후변화 소송으로 꼽힌다. 미 오리건주 지방법원은 2016년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중간상소(하급심이 계속 심리 중인 사건에서의 상소) 이후 제9연방항소법원이 원고 자격을 부인하며 각하했다. 이 사건은 무수한 절차적 시비 속에서 8년째 1심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국가가 기후위기를 방조했는지, 젊은이들의 인권이 침해됐는지의 ‘본안’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판단이 없다.

윌슨 전 대법관은 “최악의 금융위기 당시 정부의 구제금융이 결정되기까지는 단 30일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핵폭탄 문제가 터졌는데 어느 판사가 ‘교통사고 건부터 처리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그 판사가 그걸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우리에겐 6~7년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가 쓴 보충의견에는 “2020년대의 10년이 ‘분기점’이 된다”는 말이 있다.

기후위기의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다거나 심지어 위기론은 사기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윌슨 전 대법관은 “담배회사들 역시 담배와 암의 관계에 대해 ‘아니요’라 말하는 전문가들을 내세울 수 있었다”며 “하지만 이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고 법원은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윌슨 전 대법관은 “설령 과학적으로 완전히 분명하지 않을 수 있더라도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시민 전체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와 독일 등 세계 사법부는 조금씩 미래세대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윌슨 전 대법관은 “(사법부들에) 긍정적인 변화는 있다. 하지만 충분히 강력하진 못하다”고 했다. 그는 “사법부의 변화 추세를 강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내가 언론과 인터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기후변화로부터 생존할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슈&탐사팀 이경원 이택현 정진영 김지훈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