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봉호 (6) 추운 날 수업 들어오신 선생님 “어가 어어서 마도 모아 거다”

입력 2023-04-25 03:07
한국 전쟁 당시 피난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모습. 건물이 없어 야외수업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연합뉴스

전시 상황이라 국가가 주관해서 전국적으로 치른 1961년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나는 우리 학교에서 1등, 영일군에서 2등이란 좋은 성적을 얻었다.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의 칭찬을 받았고 고향에서 가까운 명문 경주중학교에 지원해 4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경주 중·고등학교 건물은 육군병원으로 수용됐기 때문에 합격자 발표나 입학식뿐만 아니라 모든 수업도 계림(鷄林)에서 이뤄졌다.

계림은 신라 초기부터 있었던 유서 깊은 숲으로 많은 전설이 얽힌 유명한 장소였으나 중학교 교실로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돌멩이를 하나씩 깔고 앉아서 무릎 위에 책을 얹고 공부를 했으니 불편한 건 고사하고 여러 학급이 여기저기서 서로 가까이 수업을 했으니 집중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거기다가 비가 오면 집에 가야 했으니 학생들은 좋아했으나 별로 싸지 않은 등록금은 제값을 할 수 없었다.

그해에는 전쟁의 혼란으로 봄이 아닌 가을에 입학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겨울이 왔다. 날씨가 추워지니 숲에서의 수업은 불가능했다. 전교생이 서천을 넘어서 그래도 지붕과 벽이 있는 서악서원이란 곳으로 옮겨 갔는데 내가 속했던 1학년 D반은 C반과 함께 서원 2층 마루를 교실로 쓰게 됐다. 100명이 훨씬 넘는 남자아이들이 사닥다리 못지않게 가파른 좁은 계단 하나로 오르내렸는데 한 번도 사고가 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책걸상은커녕 앉을 자리도 부족해서 앞에 놈 궁둥이에 무릎이 닿도록 붙어 앉았고 책 놓을 자리도 없었으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국어 교과서가 없어서 ‘시조백수’란 책을 대신 사용했는데 읽고 배워도 시간이 남아 선생님이 무조건 다 외우라고 하셨다. 그 덕에 지금도 수많은 시조를 줄줄 외울 수 있게 됐다.

젊은 영어교사는 걸핏하면 대나무 빗자루로 학생들을 사정없이 때렸고 학생들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면 반장에게 시켰는데 반장이었던 나는 맞지 않기 위해서 영어만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체벌은 반대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이 공부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음을 경험했다. 대학 영문과에 진학한 것도 그 매질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2학년이 되자 겨우 임시교사가 마련돼 입학 후 처음으로 지붕과 벽 외에 창문도 있는 교실과 책걸상을 갖게 됐다. 그러나 마루에는 아직도 자갈이 깔려 있고 난로 같은 사치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겨울이 오자 얼마나 추웠는지 어느 아침 첫 시간에 교실에 들어오신 물리 선생님이 “어가 어어서 마도 모아 거다(혀가 얼어서 말도 못 하겠다)”는 말씀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모두 같이 웃었다.

그러나 나라가 전쟁 중이라 온 국민이 고생하는 상황이었으니 그 정도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어느 학생이나 선생님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