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봉호 (5) 대포와 비행기의 사격과 폭격에 잿더미 된 우리 집

입력 2023-04-24 03:04
대전시가 지난해 공개한 ‘한국전쟁기 대전 기록영상 발굴’ 중 폐허가 된 대전시가 모습. 대전시 제공

1950년 6·25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피난 갈 겨를도 없이 인민군이 우리 마을에 들이닥쳤다. 연합군의 저항으로 인민군은 그 이상 진격하지 못해서 상당 기간 우리 동네 앞 어뢰산이 최전방 전선으로 남아 있었다. 환심을 사기 위해서인지 인민군은 주민들에게 매우 친절해서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두려움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줄어들게 됐다. 오히려 주민들의 진짜 공포는 유엔군이 산 넘어서 쏘아대는 대포와 비행기가 가하는 기관포 사격 그리고 폭격이었다. 아무도 어디에 피해야 할지를 몰랐으니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나름대로 판단하는 안전지역에 가서 종일 숨어 지냈다.

그때 우리가 얻었던 유일한 정보는 대포알은 한 번 떨어진 자리에는 다시 떨어지지 않으므로 그 자리가 가장 안전하다는 것, 비행기가 폭격할 때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방향과 정 반대쪽으로 뛰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직접 목격했지만, 비행기가 떨어뜨린 폭탄은 얼마 동안 비행기와 같은 방향으로 따라가기 때문이다. 나와 동생이 선호했던 곳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윗부분이 튀어나온 큰 바위 밑이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이 비행기가 쏘는 기관포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연합군 비행기가 처음으로 마을을 폭격했다. 들판을 걷고 있는데 비행기 한 대가 낮게 날아오면서 새까만 폭탄을 떨어트렸다. 떨어지는 폭탄을 쳐다보면서 나는 비행기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힘껏 뛰어가서 가까운 언덕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얼마 후 비행기가 사라지자 집으로 향해 갔더니 우리 집 안채가 불타고 있었다. 동네에서 우리 집이 최초로 폭격을 당한 것이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온 식구와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불을 끄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가 폭탄을 맞았다고 어머니께 잘못 말해서 어머니가 불타는 집을 그대로 두고 나를 찾으러 정신없이 뛰어다니신 것이다. 얼마 후에 살아있는 나를 발견하시고는 끌어안고 많이 우셨다.

그 지역에 전투가 계속되자 더 버틸 수가 없어서 우리는 길도 없는 산을 넘어 북쪽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연합군과 인민군 군인들이 서로 총을 쏘아대는 데 그 사이로 허리를 굽히고 뛰기도 했다. 전선이 북쪽으로 물러가자 동네로 다시 돌아왔는데, 폭격이나 대포로 죽은 사람보다는 인민군이 묻어놓은 지뢰를 밟아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다시 개학한 학교로 가는 길가에는 온갖 종류의 총, 총알, 수류탄 등이 무수히 깔려 있었고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적군, 아군의 시신들이 곳곳에 썩고 있었다. 그리고 불에 탄 우리 집 안채는 그 뒤 다시 짓지 못했고 경주로 이사 갈 때까지 온 식구가 좁은 방 두 개밖에 없는 사랑채에서 살았다.

전쟁은 야만적이고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평화를 위한 마지막 전쟁’이란 주장은 전장 바깥에서나 읊조릴 수 있는 사치에 불과하다. 어쩔 수 없이 당하지만 가능한 한 없었으면 좋겠다. 정말 끔찍했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