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누구를 믿고 버텨야 하나요?”
19일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의 한 아파트 공용현관문에는 ‘전세사기 수사 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한 아파트다. 이 아파트는 전체 72가구 중 70가구가 경매를 진행 중이다. 주변 아파트는 전체 56가구 중 50가구가 이미 경매에 넘어갔다. 전세보증금 반환과 경매 일시중지 등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줄줄이 걸렸다.
현수막과 경고문을 살펴보다 만난 한 주민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기자에게 “혹시 경매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미추홀구에선 1500가구 이상이 전세사기 피해로 경매에 넘어가면서 외부인을 경매업자로 의심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외부인에 대한 거부감을 수시로 보인 주민도 있었다.
전세사기 피해자와 경매업자 간 갈등도 심해지고 있다. ‘건축왕’으로 알려진 60대 건축업자 A씨와 관련된 전세사기 피해로 전체 30가구가 통째로 경매로 넘어간 아파트에는 경매업자의 접근을 막는 경고문과 현수막이 건물 전체를 도배한 상태였다.
‘경매꾼 낙찰 시 집 내부 박살’ ‘전 세대 개박살’ 등 과격한 내용의 현수막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너희는 재산증식, 우리는 보금자리’ ‘당신들은 기회겠지만 우리들은 삶의 꿈’ 등 경매업자를 겨냥한 경고문도 집집마다 붙어 있었다.
피해자 B씨는 “싼값에 사서 비싸게 되파는 경매꾼이 낙찰받으면 우리 형편 따위를 봐줄 것 같냐”며 “최근 절반 수준까지 낙찰가가 떨어졌다는 얘기까지 나왔으니 쾌재를 부르는 건 경매꾼뿐”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전세사기가 줄줄이 발생한 뒤 퍼진 불신은 일대 부동산 중개업소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 집 보러오는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최근 1주일간 전화 문의조차 받지 못한 중개업소도 있었다. 다른 중개업소는 6개월 전에 붙인 시세 벽보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한 중개업소 사장은 “동네에 전세 물건도 없고 전세를 찾는 손님도 없다”고 말했다.
미추홀구에서 만난 피해자 대부분은 전세사기로 입은 마음의 상처가 매우 크다고 호소했다. 일부는 모든 일에 의심부터 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털어놨다. 시세를 알기 어려운 소규모 아파트·빌라의 전세계약 과정에서 아무 문제 없다는 공인중개사 말만 믿었던 피해자들이다. 하지만 건축왕의 전세사기에는 이들이 믿었던 공인중개사도 공범이었다.
피해자 C씨는 “건축왕 사건에 공인중개사가 한패였다는 수사 내용을 듣고 큰 배신감이 들었다”며 “근저당에 압류까지 있던 집이라도 크게 사업하는 분이 집주인이라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중개사 말만 믿었다가 결국 사기당했다”고 했다. C씨는 빚 4000만원만 떠안은 상태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 관계자는 “피해자 대다수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채 살아가고 있다”며 “정부와 인천시가 실질적인 대책을 빨리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인천=김민 기자 ki84@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