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봉호 (4) 학교 앞 논둑 총살 장면, 80년이 지났어도 눈에 선해

입력 2023-04-21 03:04
1950년 6·25전쟁 당시 인민군 부역 혐의자들이 연행되고 있다. 국민일보DB

배고픔과 질병 다음으로 나의 어린 시절을 어둡게 했던 것은 공산주의란 이념이었다. 물론 나는 그 때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나쁜지는 전혀 몰랐다. 나뿐 아니라 그 시골 주민 대부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깊은 산골에 그 이념에 매료된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걸핏하면 빨치산들이 한밤중에 마을에 들이닥쳤다. 다행히도 우리 동네에는 악독한 지주나 부자가 없었기 때문인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거나 집에 불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뜩이나 부족했던 식량과 생필품은 많이 빼앗아 갔다.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우리 아버지만 신문을 구독하셨는데, 그 때문에 주목을 받았는지 빨치산이 동네에 내려왔을 때마다 예외 없이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찾았다. 다행히도 빨치산들 가운데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들이 급습할 때마다 미리 귀띔을 해 준 덕으로 아버지는 동네 다른 집으로 피신하실 수 있었다. 파출소가 2㎞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아버지를 찾아 온 동네를 뒤질 정도로 시간을 끌지는 못했고 아버지가 그만큼 그들에게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식구들은 매번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빨치산이 지나 간 다음날에는 반드시 순경이 찾아왔다. 왜 그놈들에게 식량을 주었느냐고 다그쳤지만 어쩔 수 없어 빼앗겼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파출소로 잡혀가진 않았다. 아버지께서 피신하신 것도 빨치산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오해를 받고 파출소에서 시달리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쨌든 무고한 양민은 이래저래 힘들기만 했다.

빨치산 가운데 상당수는 잡히거나 전향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전향한 사람들은 보도연맹이란 단체에 소속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이 다시 좌익으로 전향해서 북한군을 도울까 남한 정부는 그들을 제거하기로 한 것 같다. 그 상세한 곡절은 잘 모르지만 어떤 재판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보도연맹 사람들을 군인들이 총살하는 것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다. 내가 다녔던 기계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총살하겠다는 것을 교장 선생님이 애걸해서 학교 바로 앞 논둑에서 집행했는데 전교생이 창문을 통해서 보고 말았다. 평생 처음, 그것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총으로 사람을 직접 죽이는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끔찍한가? 80년이 지났는데도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친구의 아버지 한 분도 그 시대에는 좀 개명된 분이었는데 보도연맹에 소속되었다가 총살당했다.

돌이켜보면 이념 때문에 우리만큼 고통을 많이 겪은 국민도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념 갈등이 다시 심해진 오늘날 성숙한 시민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이념에 사로잡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다시 한번 심각하게 반성하고 특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