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지도부가 소속 의원들에게 ‘말실수 경계령’을 내리며 ‘신중한 언행’을 강조하고 있다. 말 한번 잘못해서 화를 입는 것을 뜻하는 설화(舌禍)는 평상시에도 문제지만,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불거지면 해당 정치인이나 당 전체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여야의 극한 대치 속에 22대 총선이 불과 1년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작은 실수 하나로 큰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여야 모두 “제발 말조심”을 외치는 것이다.
특히 최고위원들의 잇단 실언으로 지지율 하락 사태를 겪은 국민의힘에서는 더 이상 말실수로 점수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김기현 대표는 지난 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시각 이후 당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당을 부끄럽게 만드는 언행에 대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당헌·당규에 따라 당대표에게 주어진 권한을 더욱 엄격하게 행사하겠다”고 경고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여당의 실책을 반면교사로 삼자며 내부 단속에 나섰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지난 10일 의원총회에서 “국민의힘이 잇단 구설에 오르내리고 있다. 우리 의원들은 신중을 기했으면 한다”며 SNS 활동 자제 등을 당부했다. SNS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공간이지만, 거칠고 부적절한 발언이 필터링 없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면서 설화를 빚는 채널이기도 하다.
‘노인 폄하’ ‘세월호 막말’ 등 치명적 발언들
선거판에서 설화는 가장 위험한 ‘돌발 변수’로 막판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 파문은 단 한 번의 말실수로 선거 판세가 뒤바뀐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2004년 3월 정 의장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래는 2030세대의 무대다.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 어쩌면 곧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된다”고 말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지적이 빗발쳤다. 정 의장은 노인들에게 큰절을 올리며 사죄했지만, 해당 발언은 노인세대 보수층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일찌감치 기세를 올리며 180석 이상을 노리고 있었지만 152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반면 한나라당은 구사일생하며 121석을 차지했다.
이처럼 지도부 인사의 실언은 당 전체에 악영향을 준다. 21대 총선 직전인 2020년 4월 당시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n번방 사건’과 관련해 “호기심에 n번방에 들어온 사람에 대해서는 판단이 다를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n번방 가입을 단순 호기심으로 치부한 것이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황 대표는 또 “비례정당 투표용지에 마흔 개 정당이 쭉 나열돼 있다. 키 작은 사람은 자기 손으로 들지도 못한다”고 말해 신체 비하 논란을 자초했다.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도 투표를 앞두고 지도부 설화에 시달렸다. 이해찬 대표가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 “내 딸도 경력 단절이 있었는데 뭘 열심히 안 한다” 등 사회 문제를 개인 의지의 문제로 돌리는 발언을 내놔 문제가 된 것이다. 당내에서는 “당대표가 총선 악재”라는 성토가 나오기도 했다.
총선 때는 지도부뿐 아니라 지역 후보들의 부적절한 언행도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진다. 2020년 4월 차명진 미래통합당 경기도 부천시병 후보는 방송토론회에서 “세월호 자원봉사자와 유가족이 텐트 안에서 문란한 행위를 했다”는 주장을 폈다. 이 발언에 대해 국민적 분노가 일었고, 미래통합당은 차 후보를 서둘러 제명시키며 사태 진화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미래통합당은 선거 초반 125석 이상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중도층이 대거 이탈하면서 참패(103석 확보)했다. 여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차 후보의 막말 파동으로 미래통합당 의석이 30~40석은 날아갔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2012년 19대 총선 때는 김용민 민주당 노원갑 후보의 과거 막말이 선거판을 달궜다. 그가 수년 전 인터넷방송에서 “미국을 테러하는 거예요. 유영철을 풀어서 부시, 럼즈펠드, 라이스는 아예 강간해서 죽이는 거예요”라고 말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당선이 유력했던 김 후보는 결국 패배했고, 막말의 여파는 다른 민주당 후보들에게도 미쳤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열린 총선이어서 ‘정권 심판론’이 불고 있었지만 민주당은 127석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문가들은 김 후보의 망언으로 10석 이상 손해 본 것으로 분석했다.
집토끼 잡으려다 중도층 이탈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집토끼’만 바라보다 설화에 휘말리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자신의 표심만 보고 말을 내뱉다 보니 선거판 전체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면서 “설화가 당 전체의 문제로 퍼지고 중도층이 대거 이탈하는 현상을 불러온다”고 말했다. 최창렬 용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선거 참패를 부른 언행들을 살펴보면 특정 지역이나 계층을 깎아내리는 발언이 많다”며 “표를 얻기보다 도리어 중도 표심을 잃는 결정적 영향이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설화를 막으려면 강경책이 필요하다. 박 평론가는 “실언을 하면 당 지도부의 엄중 경고나 출당 조치 등 강력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도 “사전에 설화를 일으킨 인물들에게 공천을 안 준다든지 하는 식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민지 박성영 신용일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