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로 극단적 선택을 한 피해자가 올해 들어 인천의 한 자치구에서만 3명이 나왔다. 이들은 이른바 ‘건축왕’의 전세사기 마수에 걸려 수천만원을 날린 20, 30대 젊은이들이었다. 수도요금조차 못 낼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며 돈을 돌려받으러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아무도 이들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정부가 급하게 내놓은 대책 역시 뒷북에 그쳤을 뿐 이들의 극단적 선택을 막지 못했다.
17일 새벽 2시쯤 인천시 미추홀구 한 아파트에서 30대 여성 A씨가 의식을 잃은 채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A씨 집에서는 유서가 발견됐다. A씨는 인천 일대에서 건축왕으로 알려진 60대 건축업자 B씨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B씨는 지난해 상반기 미추홀구 일대 공동주택 161채의 전세보증금 125억원을 가로챈 혐의 등으로 최근 구속 기소된 인물이다.
2019년 보증금 7200만원을 주고 전세 계약을 한 A씨는 2년 뒤 재계약하면서 보증금을 9000만원으로 올렸다. 그러나 A씨 거주 아파트는 전세사기 피해로 지난해 6월 전체 60가구가량이 통째로 경매에 넘어갔다. 이 아파트는 2017년 준공돼 전세보증금이 8000만원 이하여야 최우선변제금 2700만원을 보장받을 수 있다. 결국 A씨는 보증금을 전혀 돌려받지 못한 상태였다.
A씨는 새벽에 일을 나가 밤늦게 퇴근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보증금을 돌려받을 방법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며 뛰어다녔다. 하지만 보증금을 다시 되찾을 길은 끝내 찾지 못했다.
미추홀구에서만 건축왕 B씨와 관련된 전세사기 피해로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는 세 번째다. 불과 사흘 전인 지난 14일 한 오피스텔에서 보증금 9000만원을 받지 못한 20대 남성 C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C씨는 숨지기 며칠 전 어머니에게 전화해 “2만원만 보내 달라”고 할 정도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C씨 오피스텔은 이미 2019년 1억8000만원 이상의 근저당권까지 설정된 상태였다. 지난해 경매로 넘겨져 낙찰자가 나오더라도 그가 돌려받을 수 있는 최우선변제금은 3400만원에 불과했다. 2월에도 한 빌라에서 전세보증금 7000만원을 받지 못한 30대 남성이 숨졌다. 이 남성은 유서에 ‘이 사건이 계기가 돼서 더 좋은 빠른 대책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글을 남겼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정부가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책에는 경매 절차가 끝나야만 받을 수 있던 전세사기 피해확인서 발급을 앞당기고 긴급주거 임대주택의 6개월치 월세 선납을 없애는 내용 등이 담겼다. 피해확인서를 발급받으면 보증금 최대 3억원 이하 전셋집까지 가구당 2억4000만원을 연 1∼2%대 금리로 대출받을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대출요건이 까다로워 실제 지원을 받기 어렵다고 말한다. 소득·자산 기준을 충족하는 무주택 피해자가 새로운 전셋집에 입주하는 경우에만 대출받을 수 있다. 이미 수천만원을 날린 피해자들은 새로운 전셋집을 구할 여력이 없다. 숨진 피해자 3명 중 2명은 피해확인서를 발급받지도 못했다.
긴급주거 임대주택도 도심과 멀거나 좁은 구조여서 입주하는 피해자가 매우 적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가 추산한 전세사기 피해 가구만 3000곳에 달하는 데도 인천에 있는 긴급주거 임대주택 238개 중 8곳만 입주가 이뤄졌다.
피해자들은 1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열리는 시민사회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 참석한 뒤 인천 주안역에서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를 출범시킨다. 이들은 범정부 전담팀 구성, 전세사기 주택 경매 일시중지, 선지원 후 구상권 청구 등 대책을 촉구할 계획이다. 피해대책위 관계자는 “피해자들이 피해 주택을 낙찰받을 수 있도록 경매를 일시중지하고 대출 지원책을 마련하거나 우선매수권을 주는 등의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천=김민 기자 ki84@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