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가난했지만 나는 특혜를 받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 시대 그 지역에 흔하지 않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가정에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문을, 어머니는 한글을 읽고 쓰실 수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유일했고 주위에도 드문 경우였다. 아버지는 그 동네뿐만 아니라 이웃 동네까지 수많은 가정들의 제문(祭文)을 맡아 지으셨고 어머니는 혼사를 치른 부인들의 사돈지를 모두 대필하시거나 대독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도움을 받은 분들이 가끔씩 감사의 표시로 가져 온 떡이나 한과를 먹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선친은 독자였는데 가히 천재라 할 만큼 뛰어난 지적 능력을 소유하셨다. 증조부로부터 기본적인 한문을 배우셨지만 그 후에는 독학으로 소학(小學) 대학(大學) 주역(周易)을 공부하셨고 한시(漢詩)도 쓰셨다. 가끔 한문으로 된 삼국지를 큰 소리로 외우시는 것을 듣곤 했다.
아버지께서 어렸을 때였다. 우리 동네에서 2㎞정도 떨어져 있는 면사무소 소재지에 기계국민학교가 개교했다. 아버지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느끼시고 그 신식 학교에 입학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그러나 완고한 유학자였던 증조부가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다니지 못하셨다. 학교에 가려면 상투를 잘라야 하는데 증조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안 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은 바뀌었고 상투는 사라졌다. 그렇게 원하셨던 신식 교육 받을 기회를 놓친 아버지의 실망은 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때 학교에 다니시고 계속해서 신식 교육을 받으셨더라면 아버지는 꽤나 유명한 인사가 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고 싶던 공부를 하지 못하신 것이 큰 한으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젊었을 때부터 술을 많이 드셨고, 그 때문에 생긴 위장병은 온 식구의 걱정거리였고 아버지를 평생 동안 괴롭혔다.
배움에 대한 한은 아버지로서는 크나 큰 아픔이었지만 나와 동생들에게는 큰 복이 되었다.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내 동생이 그 동네에서 가장 먼저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 여동생 둘도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모두 선친께서 이루지 못하신 꿈을 자식들이라도 이루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훗날 내가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도 그 지역에 유학자로 알려지신 아버지께서는 별로 반대하지 않으셨는데 이 또한 상투 자르기를 허용하지 않은 유교의 고루함에 불만을 품고 계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종가 시제에 제관으로도 참여하셨다. 하지만 내가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꾸짖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다만 “내가 죽은 뒤에는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제사에 참석해라”고 딱 한 번 부탁하셨는데 아버지의 그 말씀도 순종하지 못한 것은 두고 두고 죄송할 따름이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