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한 대학 도시에서 산업화 이후 매연으로 꼬질꼬질 더러워진 중세 건물의 벽을 레이저로 몇 년 동안 닦아내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옛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지을 때도 ‘파사드’라 불리는 앞쪽 벽은 그대로 남겨둬 원형을 보존한다. 허문 벽돌도 버리지 않고 모아 뒀다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나 유적지 보수를 할 때 쓴다고 한다.
그 유난스러움이 역사를 귀하게 보존하는 선진국의 특징이란 해석에 난 반대한다. 그들은 옛날 자기 도시가 부와 문화의 중심지이던 시절 혹은 식민지를 지배하며 미국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때의 흔적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문화재 보호에 그들만큼 과도한 자원을 투입하지 않은 이유도 금방 설명된다. 힘들었던 과거가 별로 그립지 않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보다 미래에 초점을 맞추는 한국 사회의 역동성은 어두운 과거의 망각을 강요하는 경향과 닿아 있다. 과거에 일어난 불미스럽고 슬픈 일을 들추는 걸 누군들 좋아하랴마는, 우리 사회는 지나치리만큼 전진을 위한 ‘긍정적 망각’을 강조한다. 때로는 사회 전체가 “과거의 슬픔과 아픔은 빨리 잊고 앞을 향해 나아가자”고 외치는 듯하다. 압제와 가난의 서러움을 딛고 살다가 마침내 일정한 성취를 이룬 역사의 관성이 우리를 사로잡아서일 것이다. 산업화와 고도성장,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며 빠른 성취와 성공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 와중에 생겨난 피해자를 애써 외면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물론 사회의 분위기가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고통이 무자비할 정도로 개인적이라는 사실도 우리의 무심함을 부추긴다. 빨리 잊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말은 내 부모가 강제징용을 간 것도, 내 아이가 탄 배가 침몰한 것도, 내 친구가 압사를 당한 것도 아닌 경우에 더 쉽게 나온다. 우리의 마음은 다른 사람의 슬픔에 한동안 공감하지만 곧 거기서 빠져나오도록 설계돼 있다. 강제로 부모를 빼앗긴 자식, 자녀를 가슴에 묻는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은 고통의 당사자가 겪는 긴 슬픔에 비해 시효가 너무나 짧다.
그래서 고통의 당사자와 슬픔을 잊는 속도를 맞추기 위한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일제강점기 강제노동 피해자,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그 유족들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은 개인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로 시작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는 개인의 연약한 기억력은 공동체의 연대를 통해서만 복원된다. 재난과 참사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기에 기억을 위한 연대는 결국 나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기도 하다.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전 국민이 우울에 빠질 정도로 슬퍼하던 날이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애써 기억해야 할 일이 되고 말았다. 이태원 참사는 반년도 안 돼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아마 극심한 마음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이어지는 슬픔, 회한, 원망, 오해, 다툼의 과정이 모두를 괴롭고 불편하게 해서일 것이다. 고통과 슬픔을 나누는 과정이나 결과가 훈훈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 기억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연대가 이뤄진다. 기억하기 위해서 연대해야 하는 것처럼, 연대를 위해서도 기억은 필수적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잊고 싶은 기억은 지우면 현재를 직시할 수 없다. 옛날 건물을 닦는 유럽인이나 과거의 아픔을 잊으려는 우리나 그런 면에서 동일한 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미해지려는 기억을 애써 되살려 아직도 생생한 고통과 불면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웃과 함께하자. 그래야만 지난 세월 치열하게 일궈낸 성취의 열매와 오늘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다.
손화철(한동대 교수·글로벌리더십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