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엄마의 그릇

입력 2023-04-14 04:05

지난 주말 본가에 내려갔다가 예전에 엄마가 쓰던 그릇을 보았다. 찬장 속에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그릇이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대나무가 그려진 나부죽한 접시, 은색 테두리가 잔잔하게 굽이치는 모양의 장미 보시기, 보랏빛 제비꽃이 그려진 종지도 있었다. 눈에 익은 그릇을 보니 가슴이 아릿했다.

그릇을 뒤집어 보니 ‘요업개발’이나 ‘행남사 고급자기’ ‘살구꽃’ 등 빈티지 로고가 박혀 있었다. 비싼 수입 그릇은 아니지만 엄마는 이 그릇들을 아끼셨다. 일곱 남매를 키우느라 살림에 규모가 있어서 세트로 장만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릇의 굽이 우둘투둘하게 닳은 것도 있었고, 조그만 흠은 있지만 거의 새것처럼 깨끗한 그릇도 있었다.

엄마는 명절이나 제사 지낼 때만 이 그릇들을 꺼냈다. 흰 바탕에 먹색으로 대나무가 그려진 보시기는 삼색나물을 담았다. 간장이나 기름장을 내올 때는 제비꽃이 그려진 종지를 썼다. 운두가 버선코만큼 솟았고 세로 길이가 긴 접시는 붉은 실고추를 얹은 조기찜이나 수육을 담아 내오셨다.

달카닥거리며 설거지하면서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두부를 조심스레 자르던 모습. 맛소금을 투두둑 치며 김을 재던 모습, 찬물에 헹군 국수를 동그랗게 감아 놓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기억이란 과거를 담는 그릇이었다. 지난 시간의 정경이 그릇 안에 오목하게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가 요양원에서 생활하신 지도 수년째, 부엌을 둘러보면 어느 것 하나 당신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다. 엄마가 일곱 남매를 키웠던 시간은 너무 고되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보람으로 여기실까. 나는 다만 기억을 매만지며 그 마음을 짐작해 볼 뿐이다. 그릇을 헹구다 말고 코가 시큰해서 허리를 쭉 폈다. 눈으로 엄마의 그릇을 쓰다듬었다. 물기를 빼려고 뒤집어 놓은 접시에 물방울이 반짝, 빛났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