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통장이 가상화폐 거래소 사기 사건에 연루됐네요. 당신 때문에 부모님이 큰일 나게 생겼습니다.”
게임디자이너 손모(28)씨는 지난해 7월 자신을 검사라고 밝힌 A씨의 전화를 받았다. 사기 사건 공범으로 지목됐는데, 피해금만 1억원 가까이 된다는 거였다. A씨는 손씨가 의심할 틈도 없게 몰아붙였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에 있는지 실시간으로 보고하라고 했다. 연락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당장 압수수색하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자신을 ‘팀장님’으로 부르도록 하고 ‘다나까’로 끝나는 경어도 쓰게 했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이었다.
손씨는 A씨 말에 속아 500만원 상당의 가상화폐를 구입한 뒤 그에게 보냈다. “보이스피싱 아니야?”라는 지인의 말이 없었다면 5700만원을 추가로 대출받아 그것마저 송금했을 뻔했다. 손씨는 A씨 전화를 받은 지 20시간이 지난 뒤에야 보이스피싱에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처럼 사회 초년생인 20대를 노린 보이스피싱 사기가 급증하는 추세다. 12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5년간 20대 이하의 ‘기관사칭형’ 보이스피싱 피해 건수는 1만9547건으로 전체 사건의 52%를 차지했다. 같은 기간 30대 4853건, 40대 2715건, 50대 3955건, 60대 3607건, 70대 이상 2554건에 비해 월등히 많다.
특히 20대 이하 피해는 2019년 2326건, 2020년 4009건, 2021년 4251건에 이어 지난해 6196건으로 매년 증가했다. 3년 사이 약 2.7배 늘었다. 30대가 1158건에서 716건, 40대가 625건에서 451건, 50대가 1372건에서 565건 등으로 전 연령대에서 줄어들 때 20대 이하만 증가세를 보였다.
해외에서 일하는 B씨(26)도 휴가차 한국을 찾았다가 손씨와 유사한 피해를 겪었다. “구속당하고 싶냐”며 윽박지르는 검사 사칭범의 말에 B씨는 7000여만원을 대출받아 건넸다. 직장에서 해고될 수 있다는 생각에 보이스피싱이라는 생각을 못 했다고 한다. 뒤늦게 경찰에 신고했지만, 전달책만 붙잡혔다.
젊은 층이 검찰·경찰 등 ‘기관사칭형’ 보이스피싱의 주요 표적이 되는 건 사회 경험이 부족한 탓이라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경험이 부족해 당한 게 아니다”고 입을 모은다. 손씨와 B씨 모두 어느 정도 사회 경험이 있었지만, 치밀한 보이스피싱 수법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들은 20대의 불안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경제든 주거든 불안하니 강압적인 행동에 저항하지 못한다”며 “이뤄놓은 게 없어 일을 빨리 처리하려는 심리 특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도 “회사에서 말단이니 문제가 커지면 잘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범인은 그런 불안함을 노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재환 기자 j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