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피소에서 들었어요. 6촌 형님이 나오지 못하셨다고.”
11일 강원도 강릉시 포남동 아이스아레나 대피소에서 만난 전모(82)씨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텃밭에 불이 붙은 걸 보고 집에서 뛰쳐나온 전씨는 넘어지면서 대피소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뒤이어 근처에 살던 6촌 형네 가족들이 하나둘 대피소로 왔다. 그러나 6촌 형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전씨의 6촌 형은 탈출을 시도하다 화마에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전씨는 “가족이 실종신고를 했다. 드론을 띄워서 찾았다고 들었다”고 했다. 전씨 뒤로 80대 남성이 불탄 주택에서 발견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는 “강릉에 오래 같이 살면서 농사도 짓고 왕래를 많이 했던 형님”이라며 “염소를 많이 키우셨는데 (그게) 마음에 걸리셨던 건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망자 소식에 대피소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이날 강릉시 난곡동 일대에서 발생한 화재로 경포동과 산대월리, 산포리 일대 주민 450명이 아이스아레나와 사천중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로 향했다. 급하게 불을 피한 탓에 외투도 걸치지 못한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바닥에 깔린 매트 위에 앉아 뉴스를 확인하거나, 가족과 연락하며 불길 앞에 두고 온 집을 걱정했다. 오후 늦게 내린 비로 주불이 잡히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표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이날 오전 산불이 발생한 곳 근처에 사는 누나가 걱정돼 한달음에 달려갔다는 안희근(67)씨는 불을 꺼보려 했지만, 강풍 앞에 속수무책이었다고 했다. 논에서 소방호스를 끌어와 연신 물을 뿌려댔지만 불길은 10분 만에 누이 집을 집어삼켰다. 안씨는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강릉에서 30년 사는 동안 바람이 이렇게 거세게 부는 건 처음 봤다”고 말했다.
옥수수 농사를 위해 평창에 가 있었던 김남도(69)씨는 불을 끄려는 노력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불이 났다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집은 다 타고 뼈대만 남은 상태였다. 그의 신발은 진흙과 털어내지 못한 검은 잿가루가 가득했다. 김씨는 “옷은 어제 입고 나온 게 전부”라며 “닭장에 있던 닭 12마리도 전부 탔다”고 탄식했다. 아침 밭일 때 입었던 작업복 그대로 대피한 함모(75)씨도 “단층집이 홀랑 다 탔다. 농기계랑 오토바이도 두고 왔는데…”라며 말을 삼켰다.
70년간 강릉에 살았다는 A씨는 17년 전 양양 낙산사에서 발생한 화재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는 “낙산사에서 크게 불이 났는데 그때도 바람이 오늘처럼 불었다. 작정하고 집을 다 태우려고 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몇몇은 집을 확인해 보겠다며 대피소를 나섰다. 한 이재민은 “주불이 잡혔다니 다행이다. 집이 어떻게 됐는지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건질 만한 게 있는지도 살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강릉=김재환 기자 j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