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호 관광지로 무섭게 번진 시뻘건 화마… 비가 막았다

입력 2023-04-12 04:07
강원도 강릉시 난곡동에서 11일 오전 발생한 산불이 순간풍속 초속 30m의 태풍급 강풍을 타고 빠르게 확산했다. 산불에 따른 잿빛 연기가 경포해변으로 퍼지고 있다(왼쪽 사진). 강릉시 한 주민이 불에 탄 집에서 소방대원의 도움을 받아 소를 끌고 나오고 있다. 독자 제공, 연합뉴스

역대급으로 거센 강풍을 탄 대형 산불이 발생한 11일 오전 강원도 강릉시 난곡동에서 2㎞가량 떨어진 안현동의 한 펜션은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폭격이라도 맞은 듯했다. 바로 옆 건물에서도 하얀 연기와 불길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안현동 마을은 산불로 발생한 연기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소방차 수십여대가 마을 곳곳마다 자리를 잡고 계속해서 물을 뿜어댔지만 강한 바람에 속수무책이었다.

경포해수욕장과 경포호 등 관광지로 유명한 안현동 일원은 이날 오전 8시22분쯤 난곡동에서 발생한 산불로 삽시간에 폐허로 변했다.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던 주택과 펜션들도 잿더미로 변했다. 평소 관광객들로 붐볐던 모습은 사라지고 매캐한 연기와 산불만이 도심을 가득 메웠다.

난곡동에서 시작한 산불은 최대 순간풍속 30m의 강한 바람을 타고 3시간도 채 안 돼 안현동 일대를 집어삼켰다. 산불은 강풍을 타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도깨비불처럼 날아다녔다. 불은 경포호 일원의 소나무 숲까지 번져갔다. 불이 붙은 소나무는 강한 바람이 더해지자 ‘쩍쩍’ 굉음을 내며 타들어 갔다.

난곡동 앞 공터에도 주민들이 모여 산불이 난 마을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산불 피해를 보았다는 이복례(78·여)씨는 “70년이 넘도록 이 마을에 살았는데 이렇게 불이 난 것은 처음”이라며 “아들 전화를 받고 10시쯤 집을 나섰는데 얼마나 바람이 불던지 오토바이를 타고 넘어질 뻔했다”고 말했다. 이어 “집이 얼마나 피해를 보았는지 궁금한데 불이 워낙 크다 보니 가까이 가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산불은 태풍급 강풍이 더해지면서 더 큰 피해를 입혔다. 강풍에 대피하는 사람은 물론 불을 끄는 이들도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주민 권정숙(55·여)씨는 “8시30분쯤 산불이 막 번지기 시작할 때는 서 있지 못할 만큼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며 “헬기라도 뜰 수 있으면 더 빨리 불을 끌 수 있었을 텐데 바람이 야속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산불이 경포호 인근 아파트 바로 앞까지 번지면서 주민들이 대피했다. 아파트 주민 김모(50)씨는 “오전 9시30분쯤 관리사무소 안내 방송을 듣고 딸과 아내를 대피시켰다”며 “차까지 걸어가는 데 다리가 휘청거릴 만큼 바람이 불었다. 강릉 살면서 이런 바람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날 기세가 등등하던 산불은 오후에 초대형헬기가 기동을 시작하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산림당국은 바람이 평균풍속 초속 12m로 잦아든 오후 2시40분쯤 헬기 4대를 투입해 진화에 나섰다. 또 헬기 투입 50분이 지났을 무렵 강릉 일대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거센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전제용 강릉시 산림과장은 “바람 때문에 많은 헬기를 동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30분가량 내린 단비 덕분에 진화율이 확 올랐고, 일몰 전 주불 진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릉=서승진 기자 sjse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