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도 금액도 다 짜놓고 뭘”… 심사위원장조차 한탄

입력 2023-04-07 00:03

지방의회 의원들의 외유성 해외출장 문제가 잇따르자 행정안전부는 민간 심사위원 확대, 심사회의록 공개 등을 통해 출장 심사 기능을 강화해 왔다. 그럼에도 국민일보가 6일 전국 243개 지방의회의 해외 출장내역 및 심사회의록을 전수 분석한 결과, 여전히 전국 각지에서 요식 행위에 불과한 유명무실 심사가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행안부는 출장 필요성, 방문국 타당성, 출장자 적합성, 경비의 적정성 등 총 19개 문항으로 구성된 심사기준표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적합, 부적합 기준이 따로 없다보니 심사위원들이 출장 불허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구조다. 이미 일정이 다 정해진 상태에서 출국 1~2주 전 요식행위처럼 심사회의가 진행되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경남 양산시의회 심사회의록에는 무력한 심사 과정이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다. 양산시의회는 지난해 10월 17일부터 의장과 부의장을 포함해 의원 17명이 7박9일 일정으로 미국 출장을 다녀왔다. 그랜드캐니언·브라이스캐니언·자이언캐니언·요세미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방문 같은 관광 일정이 대거 포함됐다.

출국 13일 전에 열린 회의에서 심사위원들은 “기준대로 하면 탈락”이라며 외유성 일정에 대한 지적을 쏟아냈다. 국립공원 방문은 관광에 불과해 일정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구체적인 지적도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출장은 심사위원 전원 찬성으로 가결됐다. 심사위원장은 “코스를 바꿀 수도 없고, 금액을 바꿀 수도 없고 다 정해놔 놓고 가도 되나, 안 가도 되나 찬반만 물어보니 참 별 볼일 없는 위원회”라며 “이 위원회가 참 유명무실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탄했다. 심사위원장조차 위원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인한 셈이다.

특히 시군구에 해당하는 기초의회의 경우 유럽 대도시로 향하는 출장 계획은 기초의회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전국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됐음에도 그대로 통과됐다.

충북 진천군의회 의장과 의원 8명은 이달 7박9일 일정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출장을 떠날 예정이었다. 계획서에는 사그라다파밀리아 성당 등 스페인의 주요 관광명소가 여럿 포함됐다. 당시 심사회의록을 보면 “리스본이나 마드리드, 바르셀로나는 서울 같은 도시인데 진천군하고는 안 맞는다. 진천군과 접목할 게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참석 위원 5명 모두 동의해 통과됐으나 국민일보 보도를 통해 부실 심사 내역이 알려지자 비판 여론을 의식해 취소했다.

충북 청주시의회 행정문화위원회는 지난해 9월 22일부터 29일까지 6박8일 일정으로 프랑스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 파리생제르맹 스타디움 등 유명 관광지가 두루 포함됐다.

심사는 의원들이 출국하기 불과 7일 전 열렸다. 한 심사위원은 “어차피 외유성 연수”라며 “연수 내용과 청주시를 끼워 맞추기 한 것밖에 더 되냐”고 지적했다. 하지만 행정문화위원장이 “말씀하신 내용을 겸허하게 받아 충실하게 연수를 마치고 오겠다”고 대답하면서 심사는 싱겁게 끝났다. 해당 출장 계획은 ‘이의 없음’으로 가결됐다.

심사 과정에서 ‘의원들의 친목 도모’라는 명분을 수용한 사례도 있다. 인천 미추홀구의회는 다음 달 9일부터 7박9일 일정으로 독일, 스웨덴 출장을 계획하고 있다. 구의원 15명 전원과 직원 등 21명이 1억500만원의 예산을 들여 떠난다.

지난 2월 열린 심사위원회에서 한 심사위원은 “이번 기회를 통해서 의원님들끼리 좀 친해져서 조금 더 화합되면 구의회 발전이 더 잘될 것 같다”고 출장을 격려했다. 참석 위원 7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이 같은 부실 심사 내역이 알려지자 인천평화복지연대는 성명을 내고 의원들의 ‘친목 도모’ 단체 출장을 비판했다. 논란 이후 일부 구의원은 출장에 불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강민 이정헌 김승연 기자 riv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