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평생 일터 제일농원은 한라산 기슭 얕은 경사지(8264㎡·2500평)에 자리 잡고 있다. 귤을 크기별로 분류하는 선과장 옆 자재창고에 아내 김춘년 권사와 살고 있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단출한 살림살이다.
누구든지 그러겠지만 자식들을 키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그들에게 어려운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나도 나의 자녀들이 나도 모르는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부모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다. 오직 기도로 도울 수밖에 없다. 나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키워 주신다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늘 다짐하곤 한다.
목사가 된 맏아들 외 다른 자녀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줬다. 차남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어려서부터 영특해 한글도 일찍 깨우쳤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공부를 무척 잘해, 주위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초중고 시절 1등을 놓친 적이 없어 원‘일’룡으로 불렸다. 원 장관은 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 암송대회를 하면 산상수훈의 마태복음 5장, 주기도문이 담긴 6장,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로 시작하는 7장 등을 내리 외워내곤 했다. 중학교에 가서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는 제주시에 있는 명문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82년 수능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하고 서울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노동운동을 하다 뒤늦게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2000년에 정치에 입문했다.
원 장관을 볼 때마다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내가 고무신 가게를 할 때다. 중문 5일장에 고무신을 가져다 놓고 팔았다. 5일장으로 짐을 옮길 때 손수레를 이용했다. 그날도 아침 장사할 물건을 싣고 5일장으로 가는 데 큰 아이는 뒤에서 손수레를 밀고 둘째 아이는 옆에 매달려 손수레를 타겠다고 졸라대며 손수레 옆에 매달려 쫓아 왔다. 나는 정신없이 손수레를 앞에서 끌고 가는데, 갑자기 둘째 아이의 비명이 들렸다. 놀라 뒤돌아보니 작은 아이 왼쪽 발가락이 손수레 바퀴의 살에 끼어 발가락이 부러진 것이다.
나는 허겁지겁 피 흘리는 아이를 안고 동네 의원에게로 달려갔다. 그때는 정상적인 병원이 없어서 임시로 봉합만 하고 나중에 수술해 주리라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나 자라도록 수술을 해 주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수술하지 못한 채로 지내고 있다. 늘 마음이 아프다. 이것 때문에 군도 면제되고 특별히 양천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나는 6남매를 새벽기도와 가정예배로 키웠다. 주일예배는 당연한 거고 예배 후에도 외식을 삼가고 집에서 함께 성경공부를 했다. 누가복음 2장 52절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말씀 그대로 아이들이 알아서 오순도순 사이좋게 자라나 줬다. 딸들도 권사나 집사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손자 손녀를 합치면 여덟 명인데 신앙 안에서 자라게 해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다.
정리=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