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책을 동시에 떠올리니 여러 생각이 스쳐 갑니다. 우장춘 박사 일대기인 ‘나의 조국’에 나온 “길가의 민들레는 밟혀도 꽃을 피운다”라는 문장은 힘겨울 때마다 되뇌는 저만의 응원가입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구두 수선공이 만난 하나님’은 일상에 계신 예수님을 묵상하게 합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비겁함을 안고 사는 인간 본연의 제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활자화된 언어(책)는 생명 있는 성스러운 존재”라는 미국 출판사 랜덤하우스의 편집자 삭스 카민즈의 말처럼 책은 생명이 되어 제 삶에 녹아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체증으로 남아 있는 책도 있습니다. 지금 소개하려는 책이 그렇습니다.
때마다 찾아오는 교회에 대한 고민은 청년 때나 중년 때나 늘 하나입니다. ‘이것이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 공동체인가.’ 최근 다시 시작된 이 질문에 저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를 꺼내 읽습니다. 밑줄과 메모가 끝까지 있으니 정독했음이 분명합니다. 연필과 펜 등 다양한 필기구 자국은 여러 차례 읽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알아가야 할 내용이 참 많습니다.
책은 4부로 되어 있는데 읽을 때마다 주목하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이번에는 3부 가운데 ‘서로가 함께’라는 대목에 눈이 갔습니다. 성경에 자주 나옴에도 무심코 지나치는 ‘서로’(알레론)입니다. ‘서로 존경하라, 서로 위로하라, 서로 짐을 져 주라, 서로 기도하라, 서로 세워 주라….’
코로나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일상입니다. 여러 교회를 기웃거리며 실시간 예배에서 찬양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설교도 듣지만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올라오는 것은, 그곳에서는 내가 ‘서로’가 될 수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행정적인 관리는 훌륭히 이루어지되 상통과는 거리가 먼 우리네 익명의 공동체를 우리는 정상적인 것인 양, 심지어 하나님의 뜻인 양 여기고 있다.”
밑줄 칠 부분이 참 많습니다. 특히 저자는 교회가 ‘대조사회’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세상을 위해 존재하나 세상과는 다른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세상에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것으로 말하면, 예수에 의하여 모여지고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거룩해진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는,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여느 사회에서 상례로 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로 상종하기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대조사회를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