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은 이름만큼이나 거창한 산세(山勢)를 자랑한다. 지리산과 덕유산, 가야산 3대 국립공원에서 흘러내린 계곡은 곳곳에 명승지를 풀어놓았다. 수려한 산세 덕분에 거창은 선비의 고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서원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고 산세 좋은 곳에 누정(누각과 정자)을 세워 학문을 논하고 풍류를 즐겼다. 그 서원과 누정에 봄바람이 살랑거리면 봄꽃들이 아우성을 내지른다.
먼저 거창읍 장팔리 덕천서원이다. 장팔리는 거창읍내에서 망덕산으로 가는 아주 깊은 골짜기 마을이다. 웅곡천을 따라 깊이 들어가면 골짜기 끝에 웅곡마을이 있다. 곰발바닥처럼 생겨 웅곡이라 하고 거창 사람들은 곰실이라 부른다.
도로 옆 둔덕진 터에 덕천서원이 자리한다.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사된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 금성대군과 충장공(忠壯公) 이보흠(李甫欽)을 기려 세운 서원이다. 충장공의 18세손인 영천이씨 학두(學斗)가 부지 3만3000여㎡에 조성했다.
덕천서원에 목련꽃이 피면 거창의 봄이 시작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원 곳곳에 하얀 목련꽃들이 절정을 지났다. 시기가 약간 늦은 자목련이 절정을 맞고 있다. 꽃눈이 붓을 닮아서 목필(木筆)이라고도 하는 목련은 꽃봉오리가 피려고 할 때 끝이 북녘을 향한다고 해서 북향화(北向花)라고도 불린다. 다른 나무의 꽃이나 잎은 해를 향하고 있는데 목련꽃은 모두 반대로 고개를 돌린다.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기에 충절을 상징했다.
여기에 전설이 서려 있다. 못다 이룬 사랑 이야기다. 어느 나라의 임금에게는 외동딸인 공주가 있었는데, 공주는 북쪽 바다의 사나운 신(神)을 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공주는 자신의 사랑을 찾아 왕국을 빠져나와 먼 북쪽 바다까지 갔으나 북쪽 바다의 신은 이미 혼인한 상태였다. 이룰 수 없는 사랑임을 깨달은 공주는 그대로 북쪽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공주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바로 자신이 혼인했다는 사실임을 알게 된 바다의 신은 자신의 혼인에 대해서도 환멸을 느끼게 돼 아무 죄도 없는 아내에게도 극약을 먹였다. 자신을 사랑했던 두 여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아내의 무덤을 공주의 무덤 곁에 만들었다. 이후 공주의 무덤에서는 희고 아름다운 백목련이 피어났고, 북쪽 바다의 신의 아내가 묻힌 무덤에서는 붉은색의 자목련이 피어났다. 실제로는 이렇다. 목련은 겨울에 꽃봉오리를 맺는다. 북쪽 꽃잎보다 햇살 닿는 남쪽 꽃잎이 더 튼튼하고 잘 자란다. 작은 차이지만 개화하는 4월이 되면 꼿꼿이 선 남쪽 꽃잎에 밀려 북쪽 꽃잎은 비스듬히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서원 옆에 작은 숲과 작은 저수지가 있다. 물가에는 대앙정과 호산정 두 개의 정자가 있다. 대앙정 마루에 의자 세 개가 나란히 앉아 목련을 등지고 먼 곳을 본다. 호산정은 저수지를 가로질러 수목으로 둘러싸인 서원 일대를 바라본다. 물가 나뭇가지마다 연두가 달렸다. 물빛은 연두와 하늘빛이 뒤섞인 초록이다.
서원 앞 웅곡천에 나란히 놓인 약수교, 호산교, 폭포교는 벚꽃 궁륭이 황홀한 핫스폿이다. 연인과 사진가들이 인생사진과 작품을 남기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용원정(龍源亭)은 마리면 고학리에 있다. 기백산 줄기가 꿈틀거리며 여기까지 흘러내려온 것이 용폭(龍瀑)이고,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이 용계(龍溪)다. 기암괴석이 흩어져 있는 용계에 좁은 돌다리가 놓여 있고 그 너머에 벚나무가 웅장하다. 그 뒤에 용원정이 자리한다.
돌다리는 ‘쌀다리’라고 불린다. 다리 이름에는 사연이 깃들어 있다. 고학리 서쪽 함양군 안의면 3번국도 옛길은 조선 시대에 한양으로 가는 삼남 대로였다. 이곳에 다리가 없던 시절에는 오가는 길손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이에 1758년 해주오씨 형제가 백미 1000섬을 내놓았다. 그리고 큰 돌을 구해 석공에게 돌을 다듬게 하고 수백 명의 일족이 3일 동안 운반해 다리를 놓았다고 전한다. 벚꽃 시절 줄 서서 기다리는 포토존이다.
거창 봄 풍경의 또 다른 매력은 수양벚꽃길이다. 월성계곡에서 병곡계곡으로 가는 길옆으로 줄지어 선 수양 벚꽃나무가 화려하다. 덜 알려졌다가 요즘 인기 있는 수양벚꽃은 임불마을에 있다. 길게 늘어진 분홍빛 꽃이 가지런히 달려 있다.
계절에 상관없이 거창에서 가장 유명한 여행지는 ‘수승대’다. 인근에 지난해 10월 ‘수승대 출렁다리’가 들어섰다. 성령산과 부종산 사이 지상 50m 높이에 240m 길이로 지주 없이 걸린 현수교다.
여행메모
거창읍내 3㎞ 거리 망덕산 덕천서원
200개 계단 뒤 수승대 출렁다리
거창읍내 3㎞ 거리 망덕산 덕천서원
200개 계단 뒤 수승대 출렁다리
경남 거창 덕천서원은 거창읍내에서 3㎞ 떨어진 망덕산 기슭에 자리한다. 광주대구고속도로 거창나들목에서 빠지면 가깝다. 경남 산청과 충북 청주에도 같은 이름의 서원이 있으므로, 내비게이션에 입력할 땐 주소(거창읍 장팔길 594)로 목적지를 확인해야 한다. 용원정은 거함대로를 타고 함양 방향으로 가다 고학리로 빠져나가면 만난다. 모두 입장료와 주차료가 무료다.
출렁다리는 하절기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50분까지 개방한다. 매주 월요일은 시설물 점검을 위해 휴장한다. 출렁다리는 수승대에서 출발해 갈 수 있고, 다리 바로 아래에서 올라갈 수도 있다. 다리 바로 아래에는 무료 간이 주차장과 화장실 등이 마련돼 있다. 붐비는 시기에는 일찍 가야 주차할 수 있다. 출렁다리까지 약 200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5~8분이 소요된다.
수승대 주차장에서 추발해 계곡 동편 길을 따라 올라가 출렁다리를 건너 계곡 서편으로 내려오는 길을 추천한다. 수승대 입장료는 무료, 주차료는 3시간 이하 무료다.
거창=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