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하고 정치적인 맨해튼 검사실이 입증할 범죄 사실도 없이 전직 대통령을 체포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달 18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에 뜬금없는 체포 예언을 던지며 포르노 배우 입막음 사건을 단숨에 공론화시켰다. 2021년 1월 6일 의회 폭동을 연상시키는 ‘항의하라’는 메시지도 함께 남겼다. 경악스러운 방식의 시위 독려 문구는 한동안 잠잠했던 극우 공화당 지지자들 가슴에 불을 지핀 듯하다. 뉴욕 맨해튼 지검은 지난달 30일 대배심을 앞세워 그의 기소를 결정했는데, 이후 분위기는 트럼프가 주도하는 모양새다. 지금 미국에선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명제가 ‘마녀사냥을 위한 검찰권 남용’ 프레임과 힘겹게 싸우고 있다.
검사가 범죄 사실을 두고 정치적 판단을 해선 안 되겠지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최초의 형사기소치고 허술한 점이 많다는 비판이 주류 언론에 꽤 등장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다. 트럼프를 자주 비판해왔던 워싱턴포스트(WP) 편집위원회조차 “뉴욕주 대배심 기소는 트럼프 혐의 중 가장 설득력이 떨어진다. 전직 대통령 기소를 위한 빈약한 테스트 케이스”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 내막에는 자칫 이번 기소가 실패하면 검찰 수사에 대한 신뢰도를 오염시켜 ‘1·6 의회 폭동 선동 사건’ ‘마러라고 기밀문건 유출 사건’ 등 다른 사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녹아 있다. 사법시스템을 조롱하며 지지층을 오도해 왔던 트럼프 전략에 대한 트라우마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미 트럼프 측은 ‘범죄가 아니라 사람을 쫓는 수사’ 프레임을 들고 마녀사냥에 의한 순교자 행세를 하고 있다. 앨빈 브래그 뉴욕 지검장은 2021년 민주당 경선 때 자신이 트럼프 행정부를 100번 이상 고소하는 데 일조했다고 강조하며 승리했고, 트럼프는 그를 타락한 검사라 부른다. 빌미를 제공한 건 트럼프지만 브래그도 혼란의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공화당 주류들은 트럼프가 짜놓은 판에 서서히 빠져들어 가고 있다. 선거 승리를 위해 혹은 당내 입지를 위해 트럼프 지지자가 절실한 정치인들이 하나둘씩 트럼프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번 사건을 내년 대선을 관통하는 이슈로 만들려는 듯 지지자들에게 후원을 요청하며 검찰과의 싸움을 대선 캠페인급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의 영향은 장기적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사법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계속 악화하는 고리가 형성돼 있다. 연방검사 출신 안쿠시 카도리는 “이제 전국의 모든 지방 검사가 퇴임한 대통령을 형사 수사하고 기소할 자유가 생겼다고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공화당 우세 주에서 공화당 색채를 지닌 지방검사의 형사기소가 분출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벌써 나온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당파성은 짙어지고 분열은 심화하며 정치와 사법시스템에 대한 신뢰 상실이 가속하는 민주주의의 쇠퇴가 오게 된다. 외신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법 갈등을 겪었던 한국의 사례가 미국의 미래가 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으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당내 경선이 사실상 끝났다는 평가도 한다. 트럼프는 동정표를 끌어모으며 이미 압도적인 후보가 됐다. 트럼프가 뜰수록 조 바이든 대통령의 경쟁력도 높아진다. 트럼프는 이번 기소의 배후로 바이든을 지목하며 그와의 재대결 구도를 강화하고 있다. 사법부의 결정이 어떻게 되든 그래서 당파 구도는 바뀔 가능성이 없다. 지지층들이 서로 뭉치는 효과만 낼 것이다. 의회 폭동 2년 만에 미국 민주주의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전웅빈 워싱턴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