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미국 정부의 ‘탈(脫)중국 숙제’를 손에 들고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최근 발표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세부 시행지침에 따라 한국 배터리 제조·소재 기업들의 보조금 혜택은 유지됐다. 하지만 2025년까지 ‘메이드 인 차이나’ 꼬리표를 떼야 한다.
배터리 업체들의 시선은 미국 재무부에서 이르면 17일(현지시간) 발표할 ‘우려대상기관’ 범위와 세부 내용에 쏠린다. 미국은 내년부터 우려대상기관에서 제조·조립한 배터리 부품을 장착한 전기차를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키로 했다. 우려대상기관에서 추출·가공·재활용한 배터리 핵심 광물을 포함한 전기차 역시 2025년부터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 공급망을 전면 재편하는 데 2년도 남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조성대 한국무역협회 통상지원센터실장은 “배터리 핵심 광물의 상당 부분을 중국산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체계적인 공급망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3일 진단했다.
우려대상기관은 미국에서 지난 2021년 11월 제정한 ‘인프라 투자 고용법(IIJA)’에 정의된 국가다. 중국 북한 이란 등이 들어간다. 여기엔 중국 정부에서 소유·통제·지시하는 기업까지 모두 해당된다. 김현수 하나증권 연구위원은 “향후 중국 기업들을 해당 리스트에 포함시켜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는 카드를 미국이 계속 쥐고 있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보조금 혜택의 기준을 맞추는 일은 한국 배터리 기업들에 쉽지 않은 숙제다.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채굴·가공한 핵심 광물의 사용 기준은 올해 40%에서 2027년 80%까지 매년 10% 포인트 올라간다. 배터리 부품 역시 북미 제조·조립 비율을 현재 50%에서 2029년 100%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대신 미국은 ‘핵심광물협정’을 통해 보조금 지급 범위를 넓힐 여지를 남겼다. 실제로 미국은 지난달 28일에 일본과 협정을 맺으면서 일본산 핵심 광물을 보조금 대상에 넣었다. 한국 기업이 리튬 등의 핵심 광물 수급을 추진하는 아르헨티나 인도네시아와도 같은 협정을 체결할 경우 보조금 문턱을 넘기가 수월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다만 배터리 업체에선 “결국 미국이 내놓은 탈중국 숙제를 최대한 풀어내는 것 외에 다른 해법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미국 뿐 아니라 유럽연합(EU) 역시 핵심원자재법(CRMA) 등으로 역내 배터리 공급망 구축에 나섰다. 정만기 무역협회 부회장은 “한국 기업들의 전략적 해외투자는 물론 정부의 지원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선 단기간에 ‘탈중국 공급망’ 재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과의 기술 제휴라는 ‘우회로’를 선택할 가능성도 제기한다. 미국 완성차 업체 포드에 이어 세계 전기차 시장 1위 테슬라는 중국 배터리 기업 CATL와 기술 제휴 방식의 합작 공장 설립을 타진하고 있다. 이런 흐름이 한국 기업들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양극재 제조업체인 엘앤에프는 지난달 3일 홍콩에 본사를 둔 시노리튬 머티리얼즈와 합작회사 설립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SK온도 전구체 생산기업 에코프로머티리얼 및 중국 거린메이(GEM)와 전구체 생산시설 건립 투자협약을 체결했다. 권준수 키움증권 연구원은 “중국에서 핵심 광물을 1차 가공한 뒤 한국에서 ‘50% 이상 부가가치 창출’이라는 기준을 맞추는 방식의 합작 사례가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관측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