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삼 목사의 신앙으로 세상 읽기] 셀프 구원이 아니다

입력 2023-04-04 03:08

드라마 ‘더 글로리’ 시즌2가 방영되면서 희화화된 기독교를 넘어 왜곡된 진리에 대한 위험성이 감지된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

“너희 구원은 그렇게 쉬워?”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교의 구원이 세상의 정의보다 한참 못한 싸구려로 보인다. 여전히 온갖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자신만만하게 예배하며 구원을 확신하는 드라마 속 인물 때문이다.

더 글로리 속의 주인공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정의를 사적 복수로 실현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실현되지 못하는 정의가 사적 복수를 통해 통쾌하게 실현된다. 사람들은 공의가 실현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드라마 속 교회는 세상의 보편적 가치와 한참 멀다는 느낌을 준다.

‘교회’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예배드리는 성도들의 모습이야말로 기독교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더 글로리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죄를 회개하지 않는 예배자들의 ‘셀프 구원’ 때문이다. 본래 기독교의 예배는 정의 실현과 아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예배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 예수님은 예배자의 태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화해하고’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제물 즉, 예배의 행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관계가 어그러진 이웃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예배됨’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글로리 속 셀프 구원은 기독교의 본질적 가르침과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얼마 전 이어령 선생의 유작 ‘당신은 크리스천입니까?’라는 책을 읽고 교회가 하나님과 참 많이 멀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세간의 많은 관심 가운데 세례를 받은 이 선생은 많은 지인에게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기독교를 비판하며 무신론자로 살더니, 죽을 때가 돼서 천국에 가려고 하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그의 책을 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천국이 셀프 구원과는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도 여전히 본질을 벗어난 교회와 목회자들을 바라보며 할 말이 많았지만 그 모습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기에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어떤 선생님이 일탈을 했다고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으며 어떤 의사가 실수했다고 병원을 찾지 않을 환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게 된 동기는 자신의 무기력과 비참함 때문이었는데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니 예수님의 외로움과 고독감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책에서 그는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인간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도 ‘오병이어’의 기적만 붙드는 사람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우리 때문에 주님이 얼마나 외로우실까”라고 밝힌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며 주님과 가까워지면 질수록 주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까 고민하게 됐고, 그것이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지방이 됐다고 말한다.

참된 예배는 셀프 구원이 아닌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다. 예배에는 늘 아픔이 있다. 그 아픔 이후에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참된 구원이다. 고인이 되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종종 그런 이야기를 했다.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천박한 종교다.” 예배를 드리며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을 하고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독선적인 종교인이 되었거나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 둘 중 하나다.

김병삼 만나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