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헬렌켈러센터(센터장 홍유미)에서는 시청각장애인 자조모임 월례회가 한창이었다. 이날 목격한 자조 모임은 여느 모임과 사뭇 달랐다. 바로 소리가 없다는 점이다. 모임에 참석한 20명의 시청각 장애인은 촉수화만을 사용해 의사소통을 이어나갔다. 촉수화는 시청각 장애인들이 상대의 수화(手話) 동작을 손으로 만져가며 하는 대화를 말한다. 이들은 문화체험 장소를 어디로 할 것인지를 두고 찬반투표를 하는 등 열띤 회의를 이어갔다.
헬렌켈러센터는 밀알복지재단이 2019년 4월에 만든 시청각장애인 지원센터다. 센터는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고 인식개선, 점자·촉수화 교육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외에 자조 모임 등을 만들어 시청각장애인들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네트워크도 구축하고 있다.
자조모임을 마친 뒤 시청각장애인 김용재(52)씨와 한은정(52)씨를 만났다. 이들을 인터뷰하기 위해서는 통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두 사람의 모국어는 한국어도 아닌 수어이기 때문이다.
헬렌켈러센터에서 희망을 찾다
김씨는 보거나 듣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는 전농전맹인 시청각장애인이다. 세상에 태어난 지 1년 만에 청각장애인이 됐다. 33세에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고 11년 후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하루아침에 시청각장애인이 됐다.
김씨는 “이후 두 달 동안 집에만 있었다. 당시엔 활동보조사도 없어 암흑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손끝새’라는 모임에서 우연히 헬렌켈러센터 개소 소식을 접했다.
“당시 손창환씨 이야기(본보 2022년 6월 28일 31면)를 듣고 저도 모임에 나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후 제 삶은 활기를 찾았습니다.”
김씨는 헬렌켈레센터에서 소풍과 문화체험활동, 점자정보단말기 교육 등을 받았다. 현재는 다른 시청각장애인 1명에게 매주 월요일 1시간가량 점자정보단말기 교육도 해주고 있다. 그는 “매우 보람을 느낀다. 나도 시각장애인이 됐을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었다”면서 “나도 누군가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전했다.
한씨의 경우도 비슷하다.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난 한씨는 둘째 딸을 임신하고 시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김씨와 같은 병을 진단받았다. 이후 이혼과 함께 자녀들과도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그를 휘감았고 수차례 극단적 선택도 시도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헬렌켈러센터를 찾았고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끼리 서로를 이해하며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헬렌켈러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조금씩 희망을 찾아가는 중이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수어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던 김씨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이런 모임과 단체를 통해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어갔으면 한다”고 전했다.
한국서 헬렌 켈러가 나올 수 없는 이유
김씨가 인터뷰를 마치고 갑자기 통역사에게 촉수화로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할 얘기가 더 있으니 시간을 더 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이후 옆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이어간 이야기는 시청각장애인들에 대한 지원이 확대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홍유미 센터장은 “시청각장애는 시각장애나 청각장애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장애임에도, 장애인복지법상 별도의 장애유형으로 구분돼있지 않다”며 “외부 소통이 어렵고 정보 습득에도 취약한 장애 특성상 홀로 고립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시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정확한 실태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어 고립된 시청각장애인이 얼마나 되는지 추정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법과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원센터 운영과 장애인들의 자립과 의사소통 지원을 위한 교육, 전문인력 양성·파견 등 다양한 지원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홍 센터장은 “한국의 시청각장애인들은 헬렌켈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대부분 경제적 상황이 어렵고, 정부의 지원과 관심도 적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가 시청각장애인 특별법을 개정해 시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지원을 확대해줘야 한다”면서 “촉수화가 모국어인 장애인들을 위해 전문 활동 지원사 육성도 절실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주변에 제대로 된 장애 판정을 못 받은 시청각장애인들이 적지 않다”면서 “너무 마음 아픈 일이다. 정부가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시스템과 지원을 늘려줬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교육을 해주는 곳도 부족하다. 시청각장애인도 스펙트럼이 넓다. 모든 장애인들이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글·사진=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