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촉발된 은행권 위기가 일단 진정 국면으로 접어드는 분위기다. 금융당국이 발 빠르게 개입해 예금 전액 보호 조치, 유동성 공급책 등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전을 다한 결과다. 하지만 시장의 불안감이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최악의 고비는 넘겼지만, 언제 위기의 불씨가 살아날지 모른다는 우려가 크다. 미국 은행권에서는 수년에 걸쳐 전개되는 ‘슬로 모션’ 위기 가능성 등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 상업용 부동산 시장 침체도 여전히 시장의 긴장감을 키우는 요인이다.
느리게 진행되는 위기
미국 정부는 은행권 위기와 관련한 후속 조치에 힘을 쏟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SVB와 시그니처은행의 파산 원인이 느슨해진 은행 관리·감독에 있다고 진단하고, 자산 규모 1000억~2500억 달러 은행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할 것을 금융당국에 지시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도입했다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완화했던 ‘도드 프랭크법’을 재정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SVB 사태로 번진 금융시장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최근 불안은 크레디트스위스(CS), 도이체뱅크를 거쳐 미국 증권사 찰스 슈왑에도 번지고 있다. 찰스 슈왑은 미국 최대 증권사 겸 자산운용사로, 금리 상승에 따른 미실현 채권평가손실 문제가 거론되며 시장 불안의 중심에 섰다.
물론 “파산 가능성은 과도한 우려”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오히려 전문가들은 시장에서 ‘현재진행형’인 불안 그 자체가 리스크가 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공포 심리에 예금자 이탈이 가속화되면 순식간에 유동성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3일 “위기에 무딘 것은 문제지만 과도하게 예민한 것은 더 나쁘다”라고 말했다.
다만 수년에 걸쳐 중소 규모 은행과 대출기관의 위기가 고조될 것이라는 ‘슬로 모션’ 위기론이 주목받는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수석 경제논설위원인 그레그 입은 최근 칼럼에서 “은행 위기는 천천히 찾아오며, 시스템을 조금씩 갉아먹는 또 다른 유형의 위기가 현실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80~1994년 3000여 곳의 소규모 저축대부조합(S&L)이 문을 닫거나 구제금융을 받았던 ‘S&L 파산 사태’를 예시로 든다. 당시 폴 볼커 연준 의장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급격하게 올리자 단기자금을 조달해 부동산과 주택저당증권(MBS)에 투자하며 자금을 운용하던 S&L 조합들이 급격한 수익성 악화로 연쇄 파산했던 것이다. S&L과 중소은행이 차례로 무너진 것처럼 앞으로 중소은행 위기가 느린 속도지만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도 ‘느리게 진행되는 재앙(slow-rolling crisis)’이라는 표현을 쓰며 은행권 위기가 앞으로도 계속 천천히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상업용 부동산 대출(CRE) 부실 위험 등 또 다른 뇌관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JP모건·골드만삭스 등 미국 주요 투자은행(IB)들은 은행 위기를 재점화할 ‘시한폭탄’으로 미 상업용 부동산 대출 부실 문제를 꼽는다. 상업용 부동산 대출의 70%는 소규모 은행이 보유하고 있다.
반면교사 포인트는
SVB 사태는 국내 금융권에도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 편중된 투자 자산을 갖고 있던 금융기관들이 금리 인상기에 적절히 위험을 관리하지 못한 점, 규제 완화로 중소형 은행에 대한 금융 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점 등이 SVB 사태의 주된 원인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계 은행들에서 편중된 보유 자산의 가치하락이 위기의 단초가 됐듯 국내에서도 비은행 금융기관들을 중심으로 부동산 관련 대출 및 채무보증 확대가 리스크로 부각될 수 있다. 특히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경기가 전반적으로 위축된 데다 건설 자재 비용 인상으로 사업 추진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미분양주택이 늘어나면서 부동산 관련 대출 상환 위험은 고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금융당국은 과거 경제 위기나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안정적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31일 기자들과 만나 “우리나라는 연체율, 공실률, 임대료 추이를 고려했을 때 미국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이라며 “건전성 금리가 오르다 보니 전보다는 조금씩 악화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모두 통제할 수 있는 범위”라고 말했다.
SVB 사태로 금융당국이 추진 중이던 챌린저은행(소규모 특화전문은행), 스몰 라이선스, 비은행 지급결제안 허용 등 ‘은행권 과점 허물기’ 동력이 크게 떨어진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금융 불안이 확대되는 시기에 경쟁 확대보다는 시장 안정을 우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달 29일 진행된 ‘제2차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 회의에서는 “새로운 플레이어 도입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경쟁 강화에 따른 리스크가 커질 것” 등의 우려가 쏟아졌다. 금융위 한 관계자는 “물론 금융소비자의 편익과 제도 개선 등도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금융 안정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