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에는 각 민족 특유의 집단의식과 문화적 감성이 녹아 있다. 고대사회의 제의에서 출발해 특정 민족이 즐겨하는 춤, 노래, 이야기가 수천년 반복되고 퇴적된 문화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영화나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천년 이상 볼거리를 제공한 것이 전통연희이고 연극이었기에 문명이 발달한 지역일수록 공연예술의 역사도 깊고 풍부하다.
한국의 공연예술은 근대사에서 가장 큰 부침을 겪었다. 가면극인 탈놀이,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 음악극인 판소리 같은 전통연희는 삼국시대부터 각 지역 특색을 담으며 발전을 거듭해 180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리다 일제강점기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1910년 한일합병 당시 명동, 충무로 지역 다섯 개 이상 극장이 일본인 소유였고 일본에서 들여온 신파극 이외의 공연장에 한국인이 모이는 게 금지되면서 전통연희는 침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을 치르며 공연 자료들도 대거 소실되고 수십년 군사정권하에서 공연은 늘 검열대상이었다.
동아시아 세 나라인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공연 양식은 닮은 듯하면서 사뭇 다르다. 중국의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경극과 일본의 전통극 노와 가부키는 분장부터 의상, 대본까지 정해진 공식이 있는 양식화된 장르다. 베이징 지역 방언을 사용하기 때문에 베이징 오페라로 알려진 경극은 각 캐릭터가 입는 옷 색깔, 얼굴 분장, 안무, 노래 톤까지 모두 정해져 있다. 일본 가부키 역시 특정색을 강조한 얼굴 분장을 하고 정해진 대본에 따라 이야기를 재현한다. 중국 일본에도 가면극과 인형극이 있지만 한국의 전통연희와는 미학적 차이가 있다.
한국의 판소리, 탈춤, 꼭두각시놀이는 이야기의 큰 골격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현장성과 즉흥성이 강조되는 특징이 있다. 한 명의 소리꾼이 북치는 고수의 장단에 맞춰 창을 섞어 이야기를 들려주는 판소리는 연극의 원형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였음을 상기시켜주며 서민과 지식층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다. ‘소리’를 무대(판)에 올린다는 뜻의 판소리는 최소한의 인원과 악기로 상상력과 경제성을 극대화한 한국의 가장 매력적인 공연예술이다. 탈춤과 꼭두각시놀이는 캐릭터들이 쓰는 탈과 인형 모양이 정해져 있지만 현장에 있는 관람자들의 추임새를 유도하고 즉흥적 익살과 해학을 즐기는 열린 공연이다.
한국의 전통극에는 하층민 시각에서 부조리한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는 위트와 해학의 골계미가 넘쳤다. 연희를 통해서나마 사회적 소수자가 억압적인 지배계층을 조롱하고 비트는 전복적 공간을 허용함으로써 고달팠던 봉건사회의 평민들에게 축제 같은 해방감을 누리게 했던 것이다. 해학은 인생의 모순을 긍정하는 한국인의 여유와 통쾌한 즐거움을 선호하는 기질을, 풍자는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과 개혁의 의지를 담은 한국인의 진취적 기상을 드러낸다.
한국의 텔레비전 예능에는 이런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인 문화유전자가 녹아 있다. 아시아의 한류 팬들 가운데에는 ‘무한도전’ ‘1박2일’ ‘런닝맨’의 열성팬들이 많고 이런 예능포맷을 수입해가거나 일방적으로 베끼는 나라들도 생겨나고 있다. 매주 정해진 에피소드식 주제가 있지만 디테일을 채우는 건 출연자들이 주고받는 즉흥적 대화와 상호작용이 주는 재미다. 모든 출연자가 같은 조건에서 똑같이 경쟁하는 것도 유교적 틀을 벗어난 파격이다. 예측불허 전개가 신선한 느낌을 줘 자연스럽고 역동적이다. 정해진 대사와 연기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는 시트콤이 한국에서 성공한 사례가 드문 것도 끈끈한 팀원들의 인간미, 말장난, 유쾌함에 기반한 웃음을 예능 프로그램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연희가 지녔던 열린 공간의 현장성, 순발력에 기반한 흥을 바탕으로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를 견인했던 치열한 경쟁이 가미된 것이 21세기 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현주소다. 출연자들은 늘 미션을 수행하며 생존과 목적 달성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매주 새로운 콘텐츠를 올려야 하는 압박감을 견뎌내는 작가, 연출군단, 무거운 장비를 들고 함께 뛰는 현장스태프들의 ‘K’스타일 고군분투가 만들어낸 성과다. 다만 리얼 버라이어티쇼들이 재미와 즐거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 보니 의도된 해프닝, 과장된 언사, 사생활 노출까지 한국인들은 글로벌 문화시장의 선을 넘는 ‘쎈캐’(센 캐릭터)가 돼가고 있다. 전통연희가 그랬듯 당대의 대중문화는 우리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오늘 우리가 나눈 웃음코드를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우미성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