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대한민국 안보실장의 기막힌 퇴진

입력 2023-04-03 04:07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이 퇴임 의사를 밝힌 3월 29일 평소 친하게 지내는 한 외신기자가 단톡방에서 “K팝 행사에 문제가 있었다니 정말인가요? K팝 때문에 교체된다면 슬픕니다. 블랙핑크 좋아해요”라고 말했다. 나를 포함해 그 방에 있던 내신기자들은 탄식과 허탈해하는 웃음으로 그에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블랙핑크 외에 명확하게 알려진 사건이 없으니 아니라 할 수도 없고 참 난감했다. 그날 외신들은 대한민국 외교사령탑이 블랙핑크 행사(또는 순화해서 ‘그룹 공연’) 때문에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고 각국에 전했다.

블랙핑크 행사만으로 김 전 실장이 물러난 건 아니겠지만 이 사건이 김 전 실장 퇴진의 트리거가 됐다는 건 조금 납득하기 힘들고 낯 뜨거운 감도 있다. 일각에선 ‘한·미 신뢰’를 갖다 붙이는데 70주년을 맞은 한·미동맹이 일개 행사 조율 하나로 흔들린다는 것인지 신박한 논리였다. 미국 측에서 불만은 표했을망정 “이런 식이면 한국을 믿을 수 없다”고 했을지 의문이고, 북한이 그렇게 갈라치기를 해도 끄떡없다던 한·미 신뢰가 블랙핑크 하나로 위기에 봉착했는지도 의문이다.

이번 일에 대한 전직 외교안보수석의 평가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안보실장 정도 되는 사람을 내보낼 때는 정책 같은 걸 갖고 경질하는 모습을 보이든가 아니면 정말 그런 공연 때문이라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게라도 하든가. 본인 명예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려 망신당하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때가 될 때 명예로운 퇴진을 만들어줘야지. 일을 잘했든 못했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을 저렇게 내보내면 능력 있는 사람들이 무슨 일로 어떻게 쫓겨날지 모르는데 일하려고 하겠느냐.”

김 전 실장은 윤석열 대통령과 초등학교 동창으로 50년 지기 친구일 뿐 아니라 윤 대통령이 정치 선언을 하기 석 달여 전부터 수차례 통화하며 외교안보 자문을 받아온 ‘과외교사’였다. 윤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5시간 만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하는 ‘진기록’을 세웠는데, 이것도 김 전 실장의 개인 휴대전화로 이뤄진 것이다. 평소 미국 측 네트워크가 탄탄한 김 전 실장 덕에 한·미동맹의 산뜻한 새 출발을 알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대통령 본인이 세운 정권의 초대 안보실장이다.

그런 김 전 실장에게 윤 대통령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것 같다. 한 외교소식통은 “윤 대통령이 김 전 실장 교체를 (김 전 실장이 물러나기) 1주일 전부터 결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전 실장은 자신의 교체 가능성이 처음 보도(3월 28일)된 직후에도 주변에 자신은 건재하다는 식으로 일축했다고 한다. 실제 이날 윤 대통령과 김 전 실장이 오찬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김 전 실장은 다음 날(29일) 사직서를 냈고 후임 안보실장도 곧장 조태용 전 주미 한국대사로 확정됐다.

안보실장 교체가 속전속결로 이뤄진 건 후임인 조 실장의 일정만 봐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재외공관장회의 참석차 한국에 와 있던 조 실장은 김 전 실장 사퇴가 공식화되기 불과 몇 시간 전 주미대사 자격으로 원전 관련 비공개회의에 참석해 미국 내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한다. 심지어 외교부는 김 전 실장 사퇴가 발표된 지 30여분이 지난 오후 5시36분에도 ‘조태용 주미대사 기자간담회’를 30일에 개최하겠다고 기자단에 공지했다가 1시간 만에 취소됐다고 알렸다. 그사이 미국 측에는 주미대사 교체 통보가 부랴부랴 갔다. 블랙핑크 공연 묵살보다 이게 더 미국으로선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안보실 1차장과 갈등이 누적됐든, 업무 스타일이 대통령과 맞지 않았든 김 전 실장을 교체하는 과정은 분명 무리했다.

쫓겨나다시피 물러난 김 전 실장의 희생이 무색하게 블랙핑크 공연은 결국 무산됐다. 결과적으로 보면 수많은 일정 조율 과정에서 생긴 해프닝에 불과했던 셈이다. 김 전 실장이 억울하지 않게 공연이라도 하지.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이 더 이상의 출혈 없이 무사히 끝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김영선 정치부 기자 ys8584@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