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 위임장으로 몰래 대출 연장… 은행 “계약 무효화 못 해”

입력 2023-03-31 04:09

국내 한 시중은행이 담보제공자의 동의 없이 대출을 연장해주면서 위조된 위임장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은행은 내부통제에 구멍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대출 만기 연장 계약을 무효화해달라는 담보제공인의 요구는 거부하고 있다.

30일 국민일보가 입수한 70대 여성 김모씨의 제3자 담보제공 관련 ‘여신 거래조건변경 추가약정서(기한연장신청서)’에 따르면 2017년 8월 A은행은 김씨 집을 담보로 송모씨에게 1년 만기 2억원짜리 기업대출을 실행했다. 차주 송씨는 이후 2021년 8월까지 네 차례 만기 연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만기 연장 과정에서 김씨의 동의는 없었다. 신청서에 김씨의 서명은 없었고 차주 송씨의 서명만 담겼다. A 은행에 따르면 담보제공인의 서명이 없다고 해당 서류가 효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경우 은행은 내규에 따라 담보제공인에게 사전 안내 및 사후 통지해야 한다. 그러나 기한연장 과정에서 김씨는 어떤 통지도 받지 못했다.

특히 A 은행은 2021년 마지막 만기 연장 당시 위조 위임장까지 받아 대출 연장을 승인했다.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상 금융기관은 금융거래 또는 서비스가 자금세탁 등의 불법행위에 이용되지 않도록 고객 확인, 실제 소유자 확인 등을 위한 고객확인서를 주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고객확인을 거치지 않은 고객의 정보는 은행 전산 시스템에서 처리가 불가능하다.

만기 연장을 위해 김씨의 동의가 필수적인 고객확인서 갱신이 필요해지자, 송씨는 ‘김씨가 은행 부수 업무에 관해 대리인에게 위임한다’는 내용의 위임장을 만들어 제출했다. 김씨의 도장만 찍힌 백지 위임장에 송씨가 자필로 내용을 적어 제출하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송씨는 김씨에게 접근해 얻은 신분증, 인감, 인감증명서를 사용했다. 은행 직원은 은행 지점이 아닌 외부에서 송씨를 만나 대출연장 서류를 함께 작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위임장은 일반적으로 포함되는 위임 날짜, 구체적인 위임 권한 등 정보가 기재되지 않았지만 결재라인을 통과, 대출이 연장됐다. 하지만 지난해 담보대출 기한이 만료되면서 송씨는 상환 및 이자 납부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송씨가 원리금 상환을 거부하면 김씨가 해당 채무를 떠안게 된다.

은행은 규정 위반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계약 무효화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김씨 측은 은행이 통지 의무를 위반한 데다 위조 위임장이 쓰인 점을 들어 해당 계약이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상 위법 계약이기 때문에 해지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은행 측은 담보제공인은 금소법상 금융소비자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송씨가 대출연체 및 상환을 거부할 경우 담보제공인인 김씨가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A은행은 은행연합회의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지침 해석’ 내 금융소비자에 담보제공인이 포함되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지침에는 담보제공인이 금융소비자가 아닌 근거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현재까지 담보제공인이 금융소비자에 해당하는지를 금융당국이 공식적으로 해석한 사례도 없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이 금융소비자의 범위를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 사례처럼 담보제공인이 피해를 입었음에도 소비자 보호의 사각지대에 내몰릴 수 있는 탓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금융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법령 해석을 내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