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수련관을 지날 때였다. 쿵따, 쿵치따! 드럼 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연초에 드럼을 배우기로 결심했는데 미루다 보니 봄이 됐다. 수강 시간이나 알아볼까 해서 수련관으로 들어갔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반도 모집 중이었다. 연주실은 2층에 있었다. 방음문을 열자 드럼 치는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고, ‘담다디’를 치는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나는 그 모습에 반해버렸다. 무심한 듯 드럼을 치는 모습이 근사하기도 했지만 연주곡이 ‘담다디’여서 마음이 동했다. 때마침 수강 신청 첫날이라 운 좋게 자리가 있었다. 1주일에 한 번, 수강료도 시중 학원의 절반에 못 미쳤다. 나는 서둘러 접수를 마쳤다.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훤칠한 키로 겅중겅중 춤추며 노래하던 이상은. 개구쟁이 같은 옷차림에 삐딱하게 쓴 모자. 세련된 패션을 소화하는 모습도, 그의 청량한 목소리도 좋아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담다디’가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담다디’는 사전에 없는 단어였다. 흔히 이별 노래라면 ‘한국인의 한(恨)’이라는 것이 애절하게 그려진 가사를 떠올리지만 ‘담다디’의 노랫말은 청승맞지 않았다.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신파가 아니라 이별한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씩씩한 사랑이었다.
‘담다디’는 아이러니다. 이별을 앞둔 연인을 향한 노랫말로 들리는 한편 자신을 향한 독백으로도 들린다. 감정의 높낮이가 다르기에 같은 가사를 두고 여러 갈피로 해석된다. 누군가는 낮은음으로 이별을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높은음으로 이별을 노래한다. 저마다 다른 음역으로 리듬을 타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담다디’를 치던 아주머니는 그새 다음 곡으로 넘어가 신나게 엇박자를 타며 트로트를 연주했다. 아주머니가 ‘인생의 담다디’를 부르고 싶었던 때는 언제였을까. 노래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앙상할 것인가. 좋아하는 노래와 더불어 나이 들어가는 기분도 괜찮다고. 길가에 탄력 있게 늘어진 영춘화를 슬쩍 건드리며 집으로 갔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