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그는 스물일곱 살 청년이었다.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중국 상하이에 파송된 그는 1866년 8월 9일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사로 승선해 조선으로 향했다. 배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어느 순간 물이 빠지면서 배가 진흙 바닥에 박혀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당시 조선은 외래문화, 특히 기독교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다. 조선 관군은 배에 불을 질렀고 청년은 강으로 뛰어들었다. 겨우 뭍으로 헤엄쳐 나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관군이었다. 이 청년은 결국 관군의 창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이 같은 스토리의 주인공은 로버트 토마스(1839~1866) 선교사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통하지만 그를 향한 한국교회의 관심은 미지근한 편이다. 한국교회 주류인 장로교단이나 감리교단 소속 목회자가 아니기에 교계는 그의 삶이나 업적을 되새기는 데 소홀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흔을 넘긴 나이에 토마스 선교사의 유산을 드러내는 데 여생을 바치려는 목회자가 있다. 바로 경기도 안양 제일교회 민병소(75) 담임목사다. 지난 16일 제일교회에서 만난 민 목사는 “한국교회는 토마스 선교사에서 시작됐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토마스 선교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신학 연구에 빠져 감리교신학대(67학번)를 나온 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을, 서울대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공부했다. 이단 종파를 연구한 ‘기독교종파운동사’, 한국의 종교 역사를 일별한 ‘한국종교사’ 등 30권 넘는 책을 썼다. 그러다가 1984년 각각 ‘개신교 최초 순교자 평양 대동강 사건’ ‘R. J. 토마스 목사 연구’라는 제목이 붙은 책 2권을 번역하게 됐다. 토마스 선교사의 삶을 다룬 내용인데 이들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토마스 선교사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토마스 선교사의 어떤 부분에 매료됐던 건가.
“그가 한국교회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만나게 되는 사람이 토마스 선교사다. 그가 배에 싣고 왔던 성경이 한반도에 퍼지면서 이 땅의 복음화가 가능했다. 그의 순교 사건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제너럴셔먼호가 불에 타면서 미국은 조선에 변상을 요구했고, 이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이어졌으며, 이 조약 덕분에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그가 있었기에 헨리 아펜젤러나 호러스 언더우드 같은 인물이 조선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 토마스 선교사는 잊힌 존재가 돼버렸다.”
-감리교 목회자로서 이미 은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다. 경기도 이천, 충남 천안, 경기도 수원 등지에서 목회를 하다가 2018년 은퇴했다. 그런데 은퇴한 뒤에도 토마스 선교사를 기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토마스 선교사는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교회의 모든 의사결정 권한을 ‘회중’이 갖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에 기반을 둔 회중교회 목회자였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목회자가 아니다 보니 선교사들의 업적을 평가하는 작업이 이뤄질 때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기 전 토마스 선교사의 업적을 조사하려고 한 적이 있는데 장로교 선교사가 아닌 탓에 조사가 흐지부지돼버렸다. 나는 지금도 토마스 선교사를 생각할 때면 가슴이 저리는 느낌을 받곤 한다. 한국교회는 그를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토마스 선교사를 기리는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엔 그의 삶을 추모하는 기념예배당 하나 없다. 결국 내가 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토마스순교기념사업회를 만들었고 2021년 9월 다시 교회를 개척했다. 힘이 닿는 데까지 이 일을 해볼 생각이다.”
-‘기독교한국회중회’라는 교단을 만들 것이라고 하던데.
“토마스 선교사의 삶을 조사하면서 회중교회에 관심을 갖게 됐다. 회중교회가 지표로 삼는 것은 3가지다. 신앙, 자유, 공동체. 성경을 열린 자세로 보는 교파가 회중교회다. 스위스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가 강조한 ‘공동체 신앙’을 떠올리면 된다. 가령 회중교회에서는 설교에 재능이 있는 회중(평신도)이 있다면 담임목사의 지도를 받은 뒤 얼마든지 강단에 설 수 있다. 제일교회의 경우 아직 성도가 30여명 수준이어서 이런 시스템을 구현하기 힘든 부분이 있지만 성도가 늘고 희망자가 생기면 교육 과정을 거친 뒤 설교를 할 수 있게끔 허락할 방침이다. 물론 미리 설교문을 제출하도록 해 신학적으로 하자가 없는지 검토할 것이다. 회중이 설교할 권한을 갖는 일은 만인제사장의 의미를 구현한다는 의미도 있다. 아직은 회중교회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적지만 회중교회가 갖는 장점에 공감하는 동역자들이 생긴다면 훗날 규모가 있는 교단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토마스 선교사와 관련된 어떤 사업을 벌이고 있는가.
“1927년 평양 대동강 쑥섬에서는 성도 1000여명이 모여 토마스 선교사를 기리는 순교기념예배를 드렸었다. 이후 당시 평양 선교를 주도한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전국적으로 모금 운동을 벌여 건축 헌금을 모아 평양에 토마스순교기념예배당을 지었다. 봉헌 예배가 드려진 날짜는 1932년 9월 14일이다. 하지만 이 예배당은 6·25전쟁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현재 예배당이 있던 자리에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이 세워져 있다. 토마스순교기념사업회는 우선 이 예배당을 국내에 다시 세우는 일에 집중할 계획이다. 제일교회에 현재 토마스순교기념예배당이라는 명칭을 붙이긴 했지만, 제대로 된 예배당을 다시 짓고 싶다. 예배당이 세워지면 후원자들의 명판을 교회에 새길 것이다. 현재 토마스순교기념사업회는 한국교회연합 소속 선교 단체로도 등록돼 있다. 한국교회의 후원과 관심이 절실하다.”
-토마스 선교사를 기리는 사업들이 성공할 수 있을까.
“1년 전쯤 국민일보에 토마스순교기념사업회를 소개하는 광고를 낸 적이 있었다. 예배당 재건을 위한 후원금 계좌 등을 안내하지도 않았는데 광고를 보고 대여섯명이 후원금을 보내왔다. 후원자들에게 연락하니 다들 비슷한 말을 하더라. 광고를 통해 토마스 선교사의 삶을 알게 되니 가슴이 뭉클해지더라는 이야기였다. 토마스 선교사의 삶과 그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을 알게 된다면 감동하는 이가 많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교회는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교회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담는 도구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엔 도덕적 불감증과 물질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맘모니즘이 만연해 있다. 가나안 성도가 속출하는 것,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은 이런 배경 탓이다. 전도의 문마저도 닫혀버린 분위기다.”
-해법이 있다면.
“사람들은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들 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한국교회가 정말 새로워지려면 제3의 종교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제1 개혁은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이 이끌었고, 제2 개혁의 완결자는 존 웨슬리였다. 루터와 칼뱅, 그리고 웨슬리를 한 묶음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교리 개혁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실천적 개혁’이다. 이 개혁의 핵심은 간단하다.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회에 희망이 생긴다. 제3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때 교회에 세상을 변화시킬 힘도 생길 수 있다.”
안양=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