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남방한계선

입력 2023-03-21 04:02

1980년대 부산의 거리는 비릿했다. 항구와 어시장에서 흘러나오는 생선 비린내가 아니라 사람의 열기와 체취가 파도쳤다. “재첩국 사이소” 소리가 깨운 새벽의 골목에서 다들 분주했고, 다들 젊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때뿐이었다. 인구이동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70년부터 88년까지 부산에는 늘 전입자가 많았다. 70년대에는 한 해 10만명 넘는 사람이 다른 시·도에서 부산으로 순이동(전입자에서 전출자를 뺀 숫자)했다. 하지만 89년부터 분위기는 달라졌다. 90년대에 매년 5만명가량, 2000년대에는 4만명가량이 떠났다. 인구 유출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한국 제2의 도시라는 부산이 이 정도다. 다른 시·도는 처참하다. 사람이 떠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먹고살 게 없어서’다. 실제로 부산의 지역경제 기반은 80년대 후반부터 급속하게 무너졌다.

인구 1000만명 이상의 거대 도시(메가시티)가 탄생하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한 현상이다. 인류가 무리를 짓고 문명을 건설한 이후로 도시화는 후퇴하지 않았다. 거주지, 일자리, 상하수도, 교육·교통·보건의료 시스템 같은 인프라를 집적한 도시는 편리와 효율의 상징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수도권 집중과 지방 공동화를 내버려 두면서 수많은 부작용도 떠안았다. 차량 정체와 출퇴근 시간 증가, 국토 물류비용 상승, 지역 인프라 붕괴, 수도권 부동산 가격 급등, 기회 불평등은 사회·경제적 비용을 치솟게 했다. 삶의 질은 나빠졌고, 지역 갈등도 유발했다. 역대 정부들은 위험한 냄새를 맡았지만 경제적 효율을 포기하지 못해 시늉에 그쳤다. 그나마 참여정부가 ‘국토균형발전’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꺼내 들고 공기업·공공기관을 지방으로 보내며 포석을 깔았다. 다만 거기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부여잡고 있던 효율은 이제 비효율로 돌변하고 있다.

사실 공기업 한두 개가 내려간다고 수십 년 이어온 수도권 쏠림이 바뀌지 않는다. 해법은 기업과 일자리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무턱대고 기업들을 압박할 수도 없다. 대기업이고 중소기업이고 지방에서는 사업하기 쉽지 않다. 연구·개발센터나 본사를 지방으로 보내려고 해도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 주택, 쇼핑·문화시설, 의료체계 같은 기본 인프라도 부족하다. 전북 전주로 내려간 뒤 연금자산 운용인력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국민연금공단 사례가 단적이다. 비교적 몸집이 가벼운 벤처기업·스타트업들도 경기도 밑으로 내려가지 못한다. 사업 경력 3년 미만의 스타트업 70.7%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일반적으로 사무직은 경기도 판교, 기술직은 경기도 기흥, 연구·개발직은 대전을 ‘남방한계선’이라고 한다.

그래도 의미 있는 시도는 잇따른다. 포스코는 830억원을 들여 2021년 포스텍 안에 스타트업 육성 공간 ‘체인지업그라운드 포항’을 조성했다. 지난해 12월 현재 입주 기업은 96곳, 직원은 910명에 이른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대구에 ‘C랩 아웃사이드 대구캠퍼스’, 이달 20일 광주에 ‘C랩 아웃사이드 광주캠퍼스’를 열었다. C랩 아웃사이드는 스타트업을 키우는 창업 활성화 프로그램이다. 여기에다 삼성은 사업장을 중심으로 10년간 60조원을 투입해 지역 산업 생태계를 육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지방이 ‘먹고살 게 있는 곳’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기업만 내려가서는, 스타트업만 자리를 잡아서는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대기업-중소기업-연구소-대학’을 한데 묶은 콤팩트 클러스터라는 뿌리가 있어야 한다. 유럽의 제조업 강국 중 하나인 네덜란드는 전국 곳곳에 대학·연구기관과 기업을 묶은 산학연 클러스터를 보유하고 있다. 이게 그 나라의 경쟁력 원천이다.

김찬희 산업1부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