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에 반기 든 글로벌 자문사… 한국엔 사무실도 없다

입력 2023-03-20 04:06

한국 자본시장의 ‘큰손’ 국민연금에 감히 반기를 드는 세력이 있다. 외국인 주주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가 그 주인공이다. 양대 글로벌 자문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와 글래스루이스(Glass Lewis)는 최근 KT의 윤경림 대표이사 후보 선임 안건에 대해 찬성 의견을 권고했다. ISS는 오는 23일 예정된 신한금융지주 주주총회 진옥동 회장 선임 건에 대해서도 찬성 의견을 냈다. 이와 대조적으로 국민연금은 두 안건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 때문에 KT와 신한지주의 외국인 주주 비중이 각각 42.5%와 62.7%라는 점에서 국민연금 뜻대로 주총 결과가 나올 지 미지수라는 전망이 일고 있다. 한편으로는 글로벌 자문사의 불투명한 의사 결정 구조와 규제를 받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다는 점에서 주주 의결권 행사에 지나친 자문사 의존을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양대 자문사, 한국엔 사무실도 없다

ISS와 글래스루이스는 국내 상장사 주주총회를 앞두고 투자 기업의 안건을 분석, 안건 별로 찬성과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특히 국내 기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대체로 이들 자문사의 의견에 따른다. 전 세계 수많은 투자처 가운데 국내 개별 기업의 안건까지 따로 분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내 자본시장에서 국민연금 이상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이지만 정작 국내 기업의 안건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 모두 국내에 별도 지사를 두지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ISS의 경우 일본과 싱가포르에, 글래스루이스는 일본과 호주에는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또 두 자문사가 한국기업의 의결권을 담당하는 이들은 5명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의결권자문사 관계자는 “글래스루이스에서 한국시장을 담당하는 인력은 국내 의결권자문기관의 3분의 1도 안 될 것”이라며 “ISS 등 글로벌 대상으로 한 자문기관이 (한국처럼) 특정한 로컬시장에 진출하면 역마진(적자)이 되기 때문에 일본이나 싱가포르에 비해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낮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자문사들이 누구에게 의뢰를 받고 분석하는 지도 알 수 없다. 특정 세력이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해도 분석 대상 기업이나 다른 투자자가 알 수 없는 구조다.

글로벌 자문사의 결정이 결과적으로 주주 이익을 침해하는 결정을 내린 경우도 많다. 단적인 예로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의 주요 원인으로 손꼽히는 물적 분할 안건에도 찬성 의견을 낸 경우다. LG화학은 2020년 10월 배터리사업부를 LG에너지솔루션으로 물적분할해 상장하기로 했다. 당시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반대 의사를 밝혔고 개인투자자의 반발이 거셌지만, ISS와 글래스루이스 등이 찬성을 권고하면서 관철됐다.

LG화학은 LG에너지솔루션이 상장되기 전인 2021년 1월 15일 장중 105만원을 터치하기도 했으나, 상장 이후 주가는 흘러내렸다. LG화학의 지난 17일 종가는 70만2000원으로 고점 대비 30% 이상 하락했다.

감독 사각지대에 있는 국내외 자문사

국내 자본시장에서 의결권 자문사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은 2016년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책임 원칙)가 도입되면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 투자가가 투자 기업의 경영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기관 투자자가 무수히 많은 투자 기업의 안건을 일일이 분석할 수 없으니 대신 자문사의 분석에 기대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만 국내에서 국내·외 자문사를 관리·감독하는 주체는 없다. ISS나 글래스루이스의 경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감독을 받는다. SEC는 2020년 7월 미국 상장사에 대한 의결권 행사 권고 내용을 기관투자자 등 고객사뿐만 아니라 상장사에도 동시에 알리고 의결권 행사 대상 기업의 반론도 공유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는 미국 상장사에 한해서일 뿐 국내 기업 분석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국내 의결권자문사는 미국과 달리 감독기구조차 없다. 금융위원회는 2021년 의결권 자문사 관리와 감독을 위해 관련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고 밝혔지만,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진행된 부분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위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국내 자문사로는 대신경제연구소와 한국지배구조연구원, 서스틴베스트 등이 있다.

이 때문에 기관 투자자들이 의결권 행사에 지나친 자문사 의존을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의결권 자문 서비스의 권고안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수익성, 성장성 등을 높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며 “때에 따라서 자문사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위험도 있다. 권고를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광수 기자 g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