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석에 ‘메이저리거’ 김하성이지만, 나라면 그때 번트를 지시했을 것이다.” 2006년과 2009년, 2017년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참가했던 김인식 전 감독은 지난 9일 있었던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조별리그 1차전 호주와의 경기 9회말을 못내 아쉬워했다. 7-8로 1점 뒤진 상황, 한국은 선두타자 토미 에드먼이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갔다. 주자를 1루에 둔 채 후속타는 없었고 에드먼의 2루 도루 실패와 함께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 WBC 1라운드 통과에 빨간불이 켜진 건 사실 그 순간이었다.
김 전 감독은 “김하성이 희생번트를 잘 댔다고 하면 상대는 1사 2루에서 이정후를 만나는데, 이건 한국이 호주를 여러모로 크게 압박하는 장면이 된다”고 말했다. 호주의 입장에서는 단타로 동점을 허용하는 상황 속에서 이정후와 정면승부를 할 것인지, 아니면 끝내기 역전 주자의 출루까지 무릅쓰면서 이정후를 거를 것인지 기로에 서는 상황이었다. 반면 한국의 입장에서는 1점만 얻는다 하더라도 후공이기 때문에 연장에서의 기회를 또 노릴 수 있었다. 어차피 그 1점을 얻지 못하면 이튿날인 일본과의 경기를 꼭 잡아야 하는, 부담스런 상황을 맞게 되는 한국이었다.
대지 못한 번트들
김 전 감독은 지난 17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인근의 한 커피숍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자택에서 TV로 모든 WBC 경기를 봤다” “되도록이면 감독과 팀의 입장을 이해하며 보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그런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보면서도, ‘이건 지금 몰아야 하는데’ ‘이건 여기에다 올인을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 덧붙였다. 김 전 감독은 “선수와 코치들 모두가 호주와의 경기에 ‘올인’을 하겠다고 인터뷰를 하던데, 실제 경기는 인터뷰와 달랐다”고 했다. 4-2로 이기고 있을 때 김광현까지 포함한 모든 투수를 쏟아부어 후반 3이닝을 막았어야 했다는 것이 그의 아쉬움이다.
호주에의 충격패 이튿날인 지난 11일 일본과의 경기에서도 숨은 승부처가 있었다. 이 경기는 4대 13이라는 비교적 큰 점수차로 끝난 경기다. 하지만 5회초에 동점의 기회가 있었다는 게 김 전 감독의 말이다. 그는 “벤치가 끝까지 번트를 대게 했다면 4-4 동점이 됐을 것이고, 동점 이후에는 흐름과 분위기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3-4로 뒤지고 있던 한국은 5회초 선두타자 최정이 직구를 노려 좌전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갔다. 다음 타자 에드먼은 초구와 2구에 희생번트를 시도했지만 볼카운트 1-1이 되자 강공으로 전환했고, 결국 삼진으로 물러났다. 김 전 감독은 “선수가 번트를 못 댄다고 벤치가 판단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2사 1루에서 이정후의 2루타가 나왔으나 1루에서 출발한 최정은 3루에 머물렀다. 희생번트가 성공했다면 홈을 밟았을 주자였다.
WBC와 일본 도쿄돔 경험이 많은 김 전 감독에게, 꼭 필요한 때에 나오지 않은 두 번의 번트는 ‘대회를 준비하는 세밀함’의 부족이다. 김 전 감독은 “일본은 자국리그에서나 국제대회에서나 도쿄돔에서 번트를 많이 댄다”고 에둘러 말했다. 김 전 감독은 2009년 3월 9일 도쿄돔에서 일본을 1대 0으로 꺾은 WBC 예선 결승 막판에 많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당시 하라 타츠노리 일본 감독은 한국에 1점차로 뒤진 마지막 이닝 ‘1사 1루’에서 희생번트를 지시했다.
절체절명의 1점차 9회에 ‘1사 1루’보다 ‘2사 2루’를 택한 일본 사령탑의 의도를 김 전 감독은 오래도록 곱씹어 복기했다. 이것은 ‘빅볼’ ‘스몰볼’로 우열을 논쟁할 것이 아니었다. 그저 구장의 특성까지 고려한 ‘절실한 야구’의 자세였다는 것이 김 전 감독의 결론이다. 도쿄돔의 인조잔디는 낮게 깔린 땅볼 타구의 80% 이상을 병살타로 만들었고, 타자도 벤치도 이 병살타의 상황을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호쾌함이 곧 실력이 아니며 잘 하는 팀이 오히려 작은 야구를 할 줄도 알아야 했다. 김 전 감독은 “이번에도 일본은 투타가 완벽에 가까웠는데, 체코와 경기하는 것을 보니 희생번트를 대더라”고 말했다.
수년 걸려도 기본부터
김 전 감독은 대표팀의 일정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대표팀이 캠프에서 바로 일본으로 향했어야 하는데 한국에 들렀다가 갔다”며 “선수들의 컨디션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왔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대표팀은 지난달 미국 애리조나에 훈련 캠프를 차렸다가 지난 1일 귀국했고, 지난 4일 일본으로 향했다. 김 전 감독은 “WBC 경험이 있는 이들을 상대로 대회에서 일어나는 일, 대비하면 좋은 일 등을 자문으로 얻었어야 하는데 이번엔 그런 과정도 없었다”고도 말했다.
이번에 세계 무대에서 확인한 수준 차이를 따라잡는 데에는 왕도가 없다. “야구를 잘 하기 위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며, 이 과정에서는 선수와 지도자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고 김 전 감독은 강조했다. 김 전 감독은 “일부 선수가 받는 돈에는 거품이 있고, 지도자들의 가르치는 실력에도 문제가 생겼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학이나 고교 지도자들에게 ‘그 투수가 어떻느냐’고 물으면 ‘150㎞를 던집니다’라고만 한다”고 말했다. 김 전 감독은 “나는 그런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게 아니라, ‘제구력이 괜찮고 번트 수비도 됩니다’ ‘견제 동작이 좋고 경기를 운영할 줄 압니다’ 같은 말을 듣고자 한다. 요즘은 스피드만 말한다”고 말했다.
학원스포츠 현장의 지도자 재량 문제에 대해서도 김 전 감독은 소신 발언을 했다. 김 전 감독은 “때리면서 가르치라는 소리는 결코 아니지만, 꾸지람 섞인 지도를 전혀 하지 못하게끔 돼 있는 지금의 현실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은 꾸지람에도 학부모의 진정이 제기되는 사례가 많고 이 사례들이 교육을 망친다는 발언이었다. 그는 “과거에는 저학년도 실력이 있으면 시합에 뛰었는데, 이제는 고학년 위주가 됐다. 고학년이 뛰지 못하면 학부모가 항의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김 전 감독은 “운동 자체의 기본도 기본이지만 학생으로서의 기본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왜 아직도 ‘류현진 김광현 양현종’을 밀어내는 선수가 없느냐”고 되물었다. 김 전 감독은 “지도자라면 제자를 옳은 길로 보내야 한다”며 무조건 빅리그를 노크하는 관행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WBC 경기를 지켜본 뒤 마음이 안 좋았다고 했다. 김 전 감독은 “이걸 따라잡으려면 한참 걸린다. 수년 걸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인식 前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1947년 5월 1일 출생 ◇학력 : 배문고 ◇경력 △1990~1992년 쌍방울 감독 △1995~2003년 두산 감독 △2004 ~2009년 한화 감독 △2006년 제1회 WBC 감독 △2009년 제2회 WBC 감독 △2016년 제4회 WBC 감독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