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국제회의를 제외하면 양국 정상이 직접 만난 것은 12년 만이다. 그동안 한·일 관계는 과거에 발목이 잡혀 퇴행을 거듭했다. 정상회담 직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얼어붙은 양국 관계를 조속히 회복, 발전시키자는 데 뜻을 같이 했다”고 밝혔고, 기시다 총리 역시 “양국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고 광범위한 분야에서 소통을 강화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말했다. 공동선언조차 없는 정상회담이었지만 정상 간 셔틀외교를 복원하는 등 망가진 관계를 정상화하고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지금 세계 각국은 전면적인 국제질서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미·중의 패권 다툼으로 분업과 상호 협력을 전제로 형성된 경제질서가 퇴조해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이뤄지는 중이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 세계가 진영으로 나뉘어 대치하는 신냉전이 가시화됐다. 그 변화의 물살이 가장 격렬한 곳이 동북아다. 군사적으로는 미·중이 노골적인 샅바 싸움을 벌이고, 경제적으로는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산업의 주도권 다툼이 치열한 곳이다. 그런데 핵심 국가인 한국과 일본은 협력 강화는커녕 역주행만 거듭했다. 핵·미사일을 앞세운 북한의 위협 강도가 강해지는데 과거사 문제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기에 한·일 정상이 미래를 생각하며 경제·안보 협력 구상을 함께 밝힌 것은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복원,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 해제 등 관계 악화를 상징했던 일련의 조치들을 제거한 점이 중요하다. 이는 최근 3년간 20조원 넘게 줄어든 양국의 수출·투자를 복원하고,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등을 통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협력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중국을 뒷배 삼아 도발을 일삼는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는 협력 체제도 더욱 강화될 것이다.
물론 우리 정부의 결단에 일본이 충분히 부응하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이다. 기시다 총리는 공동기자회견에서조차 명확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히지 않았다. 함께 미래로 가자고 말하면서 눈치를 보는 이중적 태도를 고수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징용 피해자와 아픔을 공유하며 설득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 외에 일본의 적극적인 협력을 이끌지 못했다는 정치적 부담까지 떠안았다. 그만큼 가야 할 길이 멀다. 어렵게 성사된 한·일 정상회담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