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1일 개최되는 ‘서울모빌리티쇼’의 원래 이름은 ‘서울모터쇼’였다. 쌍용자동차가 사명을 KG모빌리티로 바꾸는 배경엔 이름에서 ‘자동차’를 빼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한다. 기아자동차가 2년 전 ‘기아’가 된 것도 같은 이유다. 미래 이동수단은 더 이상 단순한 기계 덩어리가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중심이 되는 전자기기에 가깝다.
전 세계 모빌리티 산업은 지금 격변기를 맞고 있다. 완성차 업체뿐만 아니라 IT업체도 이 산업에 사활을 걸었다.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 박람회인 CES가 모빌리티 기술 경연장이 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미래 모빌리티의 키워드를 꼽자면 전기차, 자율주행, 도심항공교통(UAM), 로보틱스 등이다.
이 중 전기차는 가장 빠르게 현실이 됐다. 모빌리티 생태계가 전환하는 틈을 타 중국은 새로운 패권 국가로 자리 잡았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시장에서 판매된 중국 전기차는 655만8000대로 전체 판매량의 60.5%에 달한다. 중국 업체 BYD는 187만대를 팔아 미국 테슬라(131만4000대)를 밀어내고 1위에 올랐다. 독일 3사(메르세데스 벤츠, BMW, 아우디)와 일본 도요타 등이 절대 강자로 버티는 내연기관차 시장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다. 중국 정부의 노골적인 지원이 이룬 성과다. 신외경 한국자동차연구원 전기동력기술 부문장은 최근 한 토론에서 “초기엔 중국 정부가 인위적으로 전기차 증가세를 이끌었지만 지금은 자연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한국이 견제해야 할 건 유럽이나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고 말했다.
중국 기업 다음으로 전기차 시대의 수혜자를 꼽는다면 적잖은 이들이 현대자동차그룹을 지목한다. 기아 전기차 ‘EV6’는 지난해 자동차의 본고장 유럽에서 ‘2022 올해의 차’에 선정됐다. 세계적 권위의 자동차 전문지 모터트렌드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자동차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았다. 전기차 대중화를 시작한 건 테슬라지만, 다양한 모델·스타일·가격대의 전기차를 선보이고 있는 건 현대차그룹이라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글로벌 판매량 3위에 올랐는데, 전기차 시장에서 선전하며 브랜드 이미지를 끌어올린 게 영향을 미쳤다.
완성차 업체 간의 소프트웨어 기술력 확보전도 치열하다. 소프트웨어는 자율주행, UAM, 로보틱스 등을 아우르는 미래 모빌리티의 핵심이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맥킨지앤컴퍼니는 2030년 차량용 소프트웨어 시장이 2019년보다 2.7배 늘어난 830억 달러(약 109조2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정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SDV(소프트웨어 중심 모빌리티) 기술 강화에 미래차의 성패가 달렸다”고 강조했다. 현대차는 지난해 소프트웨어 경쟁력 강화에 18조원을 쏟아 부었다. 글로벌 소프트웨어 센터(GSC)를 설립한다. 지난해 8월 자율주행 스타트업 포티투닷을 인수해 SDV 개발의 핵심 기지 역할을 맡겼다.
현대차그룹이 로보틱스 사업에 적극적인 것도 결국 소프트웨어 경쟁력 확보와 관련이 깊다. 로봇에 들어가는 라이다와 카메라 등 각종 센서,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사물 지각능력 기술 등은 자율주행차, UAM, 목적기반모빌리티(PBV) 사업의 성장과 직결된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자율주행, AI 등 신기술이 종합적으로 적용된 미래자동차는 로봇의 형태가 될 것”이라며 “자동차 기업의 로봇 전쟁은 앞으로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UAM 역시 현대차그룹이 지향하는 미래 모빌리티 혁신의 중요한 축이다. 2020년 미국에 UAM 관련 법인 ‘슈퍼널’을 설립하고, 지난해 7월에는 세계 3대 항공엔진 제작사인 롤스로이스와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정 회장은 지난해 5월 미국 뉴욕에서 가진 특파원 간담회에서 ‘완전 자율주행차’보다 ‘UAM 상용화’가 더 일찍 올 것이라고 했다.
미래 모빌리티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지만 가장 큰 위기는 외부에서 찾아왔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잘 달리던 미국 시장에 적잖은 타격이 됐다. 중국 정부가 자국 전기차 회사에 혜택을 몰아주면서 현대차그룹은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기를 못 펴고 있다. 지난 9일(현지시간) 결국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마저 친환경 기술 관련 보조금 지급 규정을 대폭 완화한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독일 폭스바겐 등 주요 완성차 업체가 생산 기지를 유럽에서 북미 지역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나온 조치”라고 보도했다. 미국 IRA와 중국의 공격적 보조금 정책에 이어 EU도 자국을 우선하는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신 부문장은 “한국 전기차 산업의 경쟁력은 파란불이다. 다만 세계 각국 정부의 자국우선주의 정책에 어떤 활로가 있을 것인지 고민하고 피해가거나 최소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도 자국 기업에 혜택을 주고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권용주 국민대 자동차학과 겸임교수는 “한국은 시장 자체는 작지만 기술 수준이 높다.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미래 기술을 테스트하는 장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제도적으로 막혀 있는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전기차가 주행 중에 멈추면 다른 전기차에서 전기를 끌어 쓰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기 거래는 한국전력을 통해야만 하는데 이런 게 제도적 장벽”이라고 설명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규제 일변도의 정책이 한국의 미래 모빌리티 산업을 갉아먹고 있다”고 꼬집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미래 모빌리티 기술은 대규모 자금과 장기 투자가 필요하다. 연구개발비 세액공제 확대, 미래차 관련 핵심인력 육성 등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15일 국가산업단지 계획 발표에서 앞으로 5년간 전기차 생산 규모를 5배 이상 확대하기 위해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