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나선 배경에는 치열한 국가 간 경쟁이 자리한다. 나라마다 반도체를 ‘안보자산’으로 분류하고, 장벽을 높이고 있다. 한국도 반도체 생태계를 탄탄하게 만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세계 무대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높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으로 ‘실리콘 실드’를 단단하게 세울 수 있다.
정부는 반도체 클러스터에 첨단기술과 최첨단 장비를 갖춘 ‘마더 팩토리’를 두고, 여기에 연계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과 연구기관을 한데 묶는 전략을 15일 내놨다. 첨단 반도체 기술과 생산역량은 한국에서 운영하고, 글로벌 시장 공략에 필요한 양산 공장은 해외에 두는 방식이다. 정부는 경기도 용인시 남사읍에 710만㎡ 규모의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해 첨단반도체 제조공장 5곳, 국내외 소부장 기업 150곳을 유치할 방침이다.
정부의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으로 신규 공장 부지를 놓고 고민하던 삼성전자의 선택지가 넓어지게 됐다. 삼성전자는 현재 평택캠퍼스 6라인까지의 건립 계획을 모두 확정했다. 최근에는 클린룸을 미리 확보하는 ‘셸퍼스트’ 전략을 천명하며 신규 공장 부지를 물색하고 있다. 한국에서 부지 확보가 여의치 않아 해외로 눈을 돌린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하지만 정부가 나서서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키로 하면서 안정적인 생산시설 확대에 나설 수 있게 됐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삼성과 반도체 산업 투자 등에 대해 긴밀히 협의해왔다. 반도체 클러스터의 성공적 조성을 위해 발 빠르게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에 20년간 300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특히, 경기 남부권을 잇는 ‘반도체 벨트’를 형성해 산업 생태계 전반에서 상승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에는 415만㎡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가 이미 조성 중이다. 이곳에는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과 50여곳의 소부장 기업이 입주할 예정이다. 이번에 새로 조성되는 반도체 클러스터와 함께 소부장 기업 및 연구기관 유치 등에서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다. 또한 ‘팹리스 밸리(판교)’ ‘기존 생산단지(기흥, 화성, 평택, 용인, 이천)’ ‘국가산단(용인)’ 등을 연계해 메모리, 파운드리, 팹리스, 소부장까지 반도체 생태계 전반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메가 클러스터’ 구축이 가능해진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계획대로 조성되면, 한국도 견고한 ‘실리콘 실드(반도체 방패)’를 지니게 된다. 여러 외부 변수에 따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 대만은 파운드리 1위 기업인 TSMC를 중요한 안보자산으로 내세운다. 장중머우 TSMC 창업자는 “TSMC에서 출발하는 실리콘 실드가 중국의 공격으로부터 대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미·중 갈등으로 촉발된 반도체 공급망 재편이라는 몸살을 앓고 있다. 생산량의 30~40%를 차지하는 중국 공장은 미국 입김에 따라 가동 여부가 불투명하다. 미국 내 투자는 까다로운 지원금 신청 조건 때문에 실익이 없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경쟁력은 개별기업의 노력만으론 한계가 있다. 국가 차원의 생태계 조성이 필수적이다”고 강조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