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미래가 담기지 않은 해법

입력 2023-03-16 04:02

여러 번 이사하면서 버리지 못한 책이 있다. 책 제목은 ‘공동의 책임과 도덕적 의무(A Mutual Responsibility and A Moral Obligation)’. 나는 2010년 6월 독일 베를린에 있는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을 취재하러 갔을 때 그곳 상임이사에게서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은 제2차 세계대전 가해국인 독일의 정부와 기업이 나치 정권 시절 강제노동 피해자 지원을 위해 23년 전 만든 기구다. 독일 정부와 기업은 25억5000만 유로와 26억 유로(모두 약 7조2000억원)를 갹출해 재단을 만들었다. 재단은 98개국에 거주하는 166만여명에게 배상을 했다.

책은 강제노동의 진상과 재단 설립의 역사를 담고 있다. 왜 60여년이 지나서야 배상 작업이 시작됐는지, 재단 설립 이후 어떻게 피해자를 지원했는지 등이 나온다. 하드커버에 230페이지 분량인 이 책은 영어판이다. 독일어판에 더해 영어판을 찍은 이유는 배상 활동과 의미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책의 서문은 출간 당시 독일 대통령인 호르스트 퀼러가 썼는데, 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그는 “피해자들은 단순히 배상받은 것이 아니다. 재단이 지급한 돈은 이러한 잘못이 실로 범죄라는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나치 시절 강제노동은 범죄였으며, 이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배상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은 금전적인 배상만 하지 않았다. 재단은 강제노동이 명백한 범죄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각인하는 활동을 했다. 생존 피해자들이 독일 초·중·고교에서 강제노동의 경험을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고 비용을 지원했다. 피해자 수백명을 찾아가 그들의 강제노동 경험담을 듣고 이를 영상과 음성 기록물로 남겼다. 주변 국가 학생을 독일에서 공부하게 하거나 독일 학생이 이들 국가에 유학하는 것을 지원하는 장학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정부와 기업이 낸 기금 가운데 3%를 재단에 남겨 이런 활동에 쓰고 있다.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의 활동은 그 이름인 ‘미래’에 걸맞게 미래세대를 겨냥한 것이었다. 재단은 역사의 교훈을 전달하는 일을 중시했다. 그 교훈은 전시 민간인의 노동력을 강제로 사용하는 것은 인권에 어긋나므로 다시는 그런 범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미래지향적 활동의 대전제는 당연히 독일 정부와 전범기업의 사죄였다.

한국 정부도 강제동원 배상 해법을 발표하면서 미래를 이야기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가 발표한 해법에 어떤 미래가 담겨 있는지 모르겠다. 한·일의 미래세대는 이를 통해 강제노동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일본의 미래세대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경험담을 한마디라도 들을 기회가 있을까. 혹시라도 누군가의 잘못된 야욕으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양국 국민은 2023년 ‘제3자 변제’의 기억을 떠올리며 강압적 행동을 비판하고 제지할 수 있을까. 정부 해법에는 미래 전쟁범죄를 막겠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강제동원 문제는 배상 말고도 할 일이 많다. 현지에서 숨진 노동자의 유골을 찾아 국내로 봉환해야 하고, 일본 기업에 있을 노동자 명부 등 사료를 더 발굴해 진상을 역사로 남겨야 한다. 오랫동안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도 논의해야 한다. 이런 일들이 해결돼야 비로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모두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사죄가 선행돼야 가능한 일이다. 정부는 ‘미래’의 의미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다.

권기석 국제부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