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베트남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하노이를 방문했다. 학술대회를 마치고 투어가 있었는데 필자를 초청한 사회과학원 교수 주선으로 월남전 당시 한국군 작전 과정에서 베트콩으로 오인돼 일가족이 사살되고 자신은 한쪽 다리를 잃은 한 남자를 면담하게 됐다. 필자가 그에게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죄한다고 했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묻지 않는다.”
그 순간 ‘아, 베트남 국민은 참으로 현명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국부 호찌민의 실용주의 정신을 계승한 베트남 공산당 지도자들은 국익을 위해 과거 총부리를 겨눴던 미국과 한국에 대해 화해하고 협력해 왔다.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 발전을 추구한 베트남은 미국과 한국의 기업을 적극 유치하고 교역을 확대해 왔다.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외국인투자 국가이고 3위 수출국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이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였지만 이제는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됐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북핵 위협을 비롯해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3자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선언은 사실 처음이 아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구축돼온 우호 협력관계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이념에 기초해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구축한다고 결의했다.
윤석열정부의 한·일 관계 정책은 박정희 대통령 결단으로 체결된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래 획기적인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기초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 선언에 기초해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하는 선제적 조치를 취했듯이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권에서 악화된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강제징용 피해 배상의 제3자 변제 해법이란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 윤 대통령은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위한 결단’이라고 자평했다. 이를 두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삼전도 굴욕에 버금가는 치욕’, 민주당은 ‘친일 본색’ ‘굴욕 외교’라고 맹비난했다. 국민의힘은 ‘미래와 국익을 위한 대승적 결단’으로 환영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일 관계에 획기적인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즉각 환영했다. 유엔 사무총장과 유럽연합(EU)도 적극 환영했다.
필자는 대구에서 2월 28일 개최된 3·1절 전야 행사 인사말에서 “과거를 잊지 말자. 그러나 묻지 말자. 3·1운동 정신인 자주독립과 자유발전을 위해 북핵 위협이 고조되고 중국의 팽창주의가 강화되고 있는 지금의 동북아 국제 정세에서 한·미동맹의 공고화와 한·미·일 협력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과거를 묻지 말고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정립하자”고 역설했다. 따라서 필자는 다음 날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발언에 적극 공감했다.
돌이켜보면 강제징용 배상 관련 논란은 대법원 판결에서 비롯됐다. 2012년 외교 문제에 대한 사법 자제의 원칙에 위배되고 국익을 고려하지 않은 판결을 내린 대법원에 이은 2018년 김명수 대법원의 무모한 판결 때문에 한·일 관계가 급격히 악화됐다. 문재인정부는 이런 사법부의 오류를 시정하기는커녕 ‘죽창가’를 부르며 반일 감정을 부추겼다. 그 결과는 일본의 수출 규제와 한국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통보로 나타났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이후 강화돼온 한·일 우호관계가 일거에 악화됐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윤 대통령이 ‘파괴적 결단’을 내렸다. 1965년 한일협정 때 ‘국익을 위해서는 원수와도 손잡아야 한다’고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말이 생각난다. 과거 군국주의 일본은 원수였지만 지금 민주주의 일본은 더 이상 원수가 아니다. 교역과 문화교류 면에서 서로 긴밀한 협력자가 됐다. 더구나 이제 우리 국력도 일본과 대등할 정도로 신장했다.
낸시 펠로시 전 미국 하원의장의 표현대로 지금 세계는 민주주의와 전제주의 간 선택에 직면해 있다. 동북아에서 북한과 러시아와 중국이 속한 전제주의 진영에 대응해 민주주의 진영에 속하는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의 강고한 동맹에 기초해 서로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대해 과거를 잊지 않되 더 이상 묻지 말아야 한다.
김형기(경북대 명예교수·경제통상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