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을 제패할 ‘제2의 반도체’로 떠오른 K-배터리가 분기점 앞에 섰다. 전기차의 심장인 배터리 시장에서 세계 1위를 굳힌다는 장밋빛 전망과 패권경쟁 속에서 일순간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중국 배터리 업체들은 ‘저가(低價) 공세’로 시장을 잠식하는 중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배터리 패권을 손에 쥐려 ‘힘의 논리’로 판을 뒤엎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14일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속 상황이다. 한 마디로 대혼란의 시대, 배터리 춘추전국시대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올해 초에 시장은 한국 2차전지 산업을 향한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다.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의 북미 진출, 합작공장 설립과 양극재 등 주요 소재기업의 공급 낭보가 잇따르면서다. 중국을 제외한 세계 시장에서 한국 배터리 3사의 점유율은 올해 1월 기준 44.4%로 1위다. 배터리 3사가 확보한 해외수주 물량 규모만 560조원을 넘어섰다.
좋은 성적표를 발판으로 주식시장에서 배터리 기업들의 주가는 ‘나홀로 상승세’를 보였다. LG에너지솔루션 시가총액(130조원)은 삼성전자(350조원)의 3분의 1수준까지 치솟았고, 2차전지 소재 기업인 에코프로비엠의 시가총액(19조원)은 SK이노베이션(16조원)을 뛰어넘었다. 전우재 KB증권 연구원은 “전기차 침투율보다 배터리 수요가 커지며 시장이 공급자 위주로 전환하고 수주 계약도 더 유리해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K-배터리의 성장이 ‘화양연화’에 그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주력 제품인 고성능 하이니켈 배터리는 중국의 저가형 리튬인산철(LFP) 배터리가 확장하면서 갈림길에 섰다. 중국 CATL의 ‘비(非) 중국 시장 점유율’은 올 1월 기준으로 24.1%에 이르렀다. 1위 LG에너지솔루션(24.4%)을 바짝 추격했다. 중국을 포함한 세계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중국이 61.2%나 된다. 한국은 23.4%에 그친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탄탄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배터리 치킨 게임’을 본격화한다면 한국 기업들과 출혈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EU에서 시동을 거는 ‘탈중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은 한국 배터리 산업에 위기이자 기회다. 배터리 원료·제조 분야의 중국 쏠림현상을 해소한다면, 한국 배터리 업체에 활로가 열릴 수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최근 양회에서 “(배터리) 호황이 끝내 흩어져 사라질까 두렵다”며 불안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다만 마냥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한국 배터리 3사는 유럽에 이어 북미에서도 단독·합작공장 13곳을 짓고 있지만, 글로벌 전기차·배터리 업체의 합종연횡 바람은 거세지고 있다. 중국 CATL 역시 미국 포드와 파트너십을 추진하면서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우회하려는 시도에 나섰다. 미국 완성차 업체들의 배터리 내재화 움직임도 변수다. 또 다른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이 자국기업 육성에 나서고, 완성차 업체들이 다양한 선택지로 한국 기업을 압박하게 되면 배터리 제조사와의 갑을 관계는 역전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또한 보급형 전기차 확산에 대비한 배터리 다변화 역시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동안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에너지 밀도를 높이며 ‘기술 격차’에 집중해 왔다. 가격 경쟁력을 갖춘 LFP 배터리를 비롯해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제품을 개발해 저가부터 프리미엄 시장까지 모두 장악할 수 있는 범용성을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다. 권용주 국민대 자동차학과 겸임교수는 “완성차 업체로 비유하면 한 가지 차종만 계속 생산하고 있는 셈”이라며 “경쟁력 확보를 위해 배터리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민철 황민혁 기자 listen@kmib.co.kr